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또 비가 온다. 올 가을은 유난히 길었고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단풍이 고운 오어사(吾魚寺)를 뒤늦게 떠올리며 안타까워했지만 철 지난 우중의 사찰 기행을 놓칠 수가 없다. 적당히 사색할 수 있는 한적한 고속도로와 비 내리는 호수의 풍광, 게다가 절은 고독할 만큼 조용할 게 분명하다. 비가 오는 날은 무작정 마음이 먼저 집을 나선다.

드문드문 남아 있던 단풍이 운제산을 밝히는데, 오어지(吾魚池)는 수면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만 그려낼 뿐 반영이 없다. 물가에 피어 있는 단풍이나 먼 하늘, 새로 놓인 출렁다리조차 밀어내고 묵묵히 비를 맞는다. 산은 산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각각 그렇게 생각에 잠겨 묵언 중이다.

오어사는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하여 항사사(恒沙寺)라 하였다. 신라 고승 원효(元曉)와 혜공(惠空)이 먹은 물고기를 살리는 법력을 겨루는데, 한 마리는 살지 못하고 한 마리가 힘차게 헤엄치자 이것을 두고 서로 자기 물고기라 하여 오어사라 명명하였다. 원효, 자장, 혜공, 의상 등 당대의 고승들이 수도했던 신라 천년고찰이다.

절은 월동 준비를 서두르다 갑자기 내린 비로 어수선하다. 대웅전 뒷마당은 머리 푼 광녀처럼 을씨년스럽고 산만한데, 공사 중이던 포크레인은 시치미를 떼고 느긋하다. 대웅전에서 절을 하는데 발이 시려온다. 준비도 없이 나는 덜컥 겨울 품속에 서 있다. 한해를 장식하는 마지막과 맞물려 저절로 기도는 진지해진다. 조용히 법당을 비질하는 불자의 모습이 기도만큼 경건해 보인다.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만큼 큰 기도가 있을까?

오랜 세월 땅 속에서 잠을 자던 동종의 긴 기다림이나 낡고 낡은 원효대사의 삿갓을 바라보며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추구해온 세계관이 있었던가? 그저 그렇게 발버둥치며 세월에 떠밀려 살아온 것만 같다. 올 한 해도 예술과 여행,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있어 그나마 지루하지 않게 보낸 것 같다.

오어사 담벽을 끼고 돌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옷을 벗지 못하고 가을을 부여잡고 있다. 이미 계절은 떠나고 없는데 그 뒤안길의 처연한 몸부림이 애처롭다. 가야 할 때를 알고 돌아서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답듯이 살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시의적절한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잎 큰 오동나무나 후박나무처럼 후두둑 미련없이 지는 나무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다리를 건너고 비탈진 산길을 도는데 때 아닌 진달래가 피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한 녀석을 따라 여러 송이가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피었으리. 눈을 뜨고 나서야 결코 평탄치 못할 삶의 비극을 예감한 진달래, 오어지를 사이에 두고 은행나무와 둘 사이에는 아련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들의 눈빛은 초조하고 불안한데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봄, 가을, 겨울이 혼재하는 운제산을 바라보며 오어사도 나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낙엽 쌓인 산길을 천천히 사색하며 오른다. 빗소리에 묻혀서도 돌돌돌 존재감을 드러내며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 제 몸의 물을 짜내듯 발밑에서 미끌거리는 촉감도 비오는 날만 느낄 수 있다. 한 때는 요새처럼 숲을 지키던 나무들이 제 몸 하나도 가리지 못하고 하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숭숭 뚫린 겨울 숲에 하늘이 키를 낮추고 앉아 있다. 가끔은 바람이, 또 더러는 햇살이 숲을 지키며 키워 줄 것이다.

 

▲ 비 온 뒤 오어지의 모습이 아름답다. <br /><br />
▲ 비 온 뒤 오어지의 모습이 아름답다.

비가 와서 숲은 더 적막하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인적도 없다. 젖은 숲길을 걷다보니 손이 싸늘해져 오지만 800m의 산길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그저 고마운 일이다. 따끈한 보리빵과 커피 한 잔의 온기가 그리울 무렵, 붉은 감을 주렁주렁 단 감나무들이 원효암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형체를 잃고 피범벅이 된, 결코 아름답지 않은 홍시의 주검 위로도 빗줄기는 어김없이 떨어진다.

`때`를 잊은 존재들의 몸부림은 왠지 왜소하고 서글퍼 보인다. 수확의 기쁨에서 제외된 감이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관상수가 아니라는 선입견 때문이리라. 어린 시절 고향의 감나무는 앙상한 가지 끝에 까치밥 서너 개만 달고 겨울을 맞곤 했다. 소박한 풍요와 미덕, 평화가 담긴 풍경이었다.

우산을 쓰고 배추밭을 둘러보시던 노스님이 아이처럼 해맑게 반겨 주신다. 원효암이 환하다. “비 오는데 혼자 어떻게 왔어?” 낯선 이에게 보내는 첫인사치곤 유난히 살갑다. 귀가 어두우신 고령의 스님, 천진한 표정 앞에서 나는 덥석 손을 잡을 뻔했다. 스님은 요사채 뜰 위에서 잰걸음으로 운동을 하시고 나는 관음전 댓돌 위에 앉아 비 내리는 숲을 감상한다. 싸락싸락 비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스님의 신발 끄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

쓸모없이 존재하다 사라지는 것이 어디 있으랴. 시의적절한 때라는 것도 편협한 사고의 관점일 뿐이다. 고령의 육신에도 화사하게 피어나는 노스님의 미소 한 줌, 초겨울의 쓸쓸함을 밝히는 붉은 감들이 심금을 울린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란 없다. 보면 볼수록 새로워지고 알면 알수록 사랑하고 싶어지는 사람,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런 자세로 살아가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