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해 철

미안하다

방이 더럽고 누추해서

줄 것이 별로 없어서

힘들여 열어논 서랍엔

너의 슬픔을 잠재울 것 대신

세상의 아픔을 기록한

요오드징크빛 서한과

결린 데 바르는 물파스뿐이어서

훔쳐갈 무엇이 있는 것처럼

도금을 한 채 살아서

이 시대의 시인이면서

네가 훔쳐갈 좋은 시 하나 갖지 못한 채

부자로 살아서 미안하다

전문의로 일하면서 시를 써온 시인의 솔직한 고백이 감동적이다. 의사로 일하면서 많은 재화를 모을 수 있는 처지에 있지만 청빈하게 살아가는 삶의 모양이 정겹게 다가온다. 또한 시대 정신을 꿰뚫고 치열하게 시를 쓰지 못하는 자신의 문학적 자세에 대한 겸허한 반성과 성찰이 있어 더욱 잔잔한 감동에 이르게 한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