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그윽한 국화향을 생각하며 중양절 아침을 맞는다. 국화잎을 따서 술을 담그고, 화전을 부쳐 먹으며 국화 감상을 해야 하는 멋진 날, 하늘은 뿌옇게 미세 먼지로 덮여 있다. 가난하면 막걸리에 국화를 띄워 마실 정도로 조상들은 삶에 멋과 여유를 곁들였다. 시야는 한껏 흐리지만 우리는 가을을 노래하며 남쪽으로 달린다.

홍룡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원효 대사가 낙수사(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원효 대사가 당나라 승려 천 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득도하였기에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천성산(千聖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1910년대 통도사의 승려 법화가 중창하고 1970년대 말에 주지 우광이 중건 및 중수하였다.

양산의 팔경으로 알려진 홍룡폭포 때문인지 휴일이 아닌데도 주차된 차들이 제법 많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한적한 가홍정의 자태와 낙엽이불을 덮은 오솔길이 자기 성찰을 하듯 고즈넉하다. 왕대 숲 사이로 보이는 대웅전에서는 예불소리가 낭랑하고, 우측 계곡길에는 예기치 않은 방문객들로 가을이 수줍게 타고 있다.

양수 9가 두 번 겹쳐 중구일이라고도 부르는 중양절은 추석 때 제사를 지내지 못한 집에서는 차례를 지낼 만큼 큰 명절이었다. 홍룡사 대웅전에서도 대가족이 모여 제를 지내는 중이다. 우리는 폭포를 뒤로 하고 대웅전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동참한다. 수많은 방황과 노력으로 쌓아올렸던 삶을 홀연히 남겨두고 한 순간 안개처럼 떠나야 했던 영혼들, 그들을 위한 기도는 결국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언젠가 운문사 북대암에 갔더니 방금 제를 지냈다며 일면식도 없는 방문객들에게 푸짐한 공양상을 차려주었다. 대접하는 사람의 환한 미소와 친절이 모두를 감동시켰다. 그 때 진 빚을 뒤늦게 이곳에서 갚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성껏 기도를 한다. 내 생각이 여기에서 멈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구 하나 공양을 권하지도 않고 지인들끼리만 공양간으로 들어서는 풍경이 조금은 씁쓸하다.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하여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갑자기 마음에 허기감이 몰려온다. 도시라는 거대한 사회가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정서와 변화가 절집까지 스며든 것 같아 마음이 스산하다.

그들의 모습이 내 모습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에고의 시각에 갇혀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할 때가 많았으리라. 삶이 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절대적인 빈곤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따뜻한 마음과 겨자씨만한 진실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지성이 자꾸만 그리워진다.

뒤켠에 있는 무설전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법당을 한 아름의 햇살과 고요가 끝없이 채워 주고, 문밖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대숲이 청량하다. 기도를 하는 동안 마음이 밝아 오고 이내 모든 것이 감사하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사랑할 줄 아는 자세가 부족했던 스스로를 반성한다. 어디선가 쌉싸름한 국화향이 실려 오는 것 같다.

 

▲ 홍룡사 관음전과 홍룡폭포
▲ 홍룡사 관음전과 홍룡폭포

홍룡폭포로 향하는 발걸음도 가볍다. 옛날 하늘의 사자인 천룡이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을 가진 폭포로 인해 사찰은 더 유명해졌는지 모른다. 승려들이 폭포수를 맞으면서 몸을 씻고 설법을 듣던 엄숙한 곳이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명소가 되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바위 절벽에서 몸을 날리는 물의 비상, 하얗게 떨어지는 순간 물은 다시 태어나고 있다. 밤이 되어 숲이 잠든 시간에도, 경배하는 태양이 산 위에 떠올라도, 폭포는 오로지 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고요히 머물기를 원한다면 더 이상 폭포가 아니다. 힘찬 역동감이 더해질수록 폭포는 더 크고 깊은 물길을 만들어 내리라. 속이 깊고 단단한 사람이 많은 상처를 숨기고 있듯, 홍룡폭포는 얼마만큼 속을 파내고 비워냈을까?

물보라가 무지개를 만들자, 아이처럼 좋아하는 어른들이 시간을 잊고 자기를 잊는다. 떨어지는 물줄기와 관음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하얀 치아를 드러낸 이 순간이 영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영화나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감상하듯 의미심장하게 지켜본다. 무지개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내가 어린 날을 떠올리며 소원을 빌 때까지.

물 위를 떠다니는 … 나뭇잎들의 정처 없는 몸짓들이 나를 기도하게 했다. 저마다 타고난 운명이 달라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 모두에게도 정겨움이 녹아들 수 있으면 좋겠다. 무겁고 엄숙했던 순간들조차 지나고 나면 무지갯빛처럼 영롱해진다는 것을 알지만, 가을은 우리를 사색케 하고 더러는 고독 속으로 데려 간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인생이 끝났다는 누군가의 묘비명처럼 나는 늘 스스로 답을 구하고 찾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지 모른다. 가을에는 기도하며 살고 싶다. 한 순간도 살지 않은 것처럼, 온전히 썩기를 바라는 나뭇잎처럼, 사랑하고 기도하며 살고 싶다. 어쩌면 기도와 염원, 그 자체를 통해 나는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