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소유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일상이 버거웠던 젊은 날, 법정 스님은 나직한 소리로 무소유의 가치를 일러주셨다. 스님의 말씀은 바람에 댓잎이 서걱대거나, 물결에 쓸려 내려가는 조약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지치고 힘들 때면 단비처럼 마음을 적셔 주던 분, 나는 몇 번이나 벼르고 별러 불일암을 찾았다.

불일암은 송광사의 사내 암자로 고려시대 자정국사가 창건하여 자정암으로 불리었다. 몇 차례 중수를 거듭했지만 6.25 전쟁으로 퇴락하여, 1975년 법정스님이 중건하면서 불일암으로 불리며 스님의 명성만큼 유명세를 타게 된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종교를 초월하여 각박한 시대와 황량한 가슴에 윤기를 더해 주었다.

키 낮은 대나무 사립문이 한쪽 문만 열고 기다린다. 자기를 낮추고 들어오라는 뜻일까 컴컴한 조릿대 숲 터널이 이어진다. 불이문과도 같은 대숲 터널을 통과하면 피안의 세계처럼 불일암이 자리 잡고 있다. 감나무 한 그루가 쏟아지는 가을빛을 무심히 맞으며 반긴다. 정적이 흐르는 아늑한 세계 앞에서 나는 얼어붙듯 멈춰 서고 말았다.

철 지난 채소들은 윤기를 잃어가고 축대 위에는 불일암이 겸손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고요와 평화, 가을 햇살과 불일암의 신성한 만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조용히 돌계단을 오르는 내 앞에 `정진 중, 묵언`이라는 팻말이 막아선다. 키 큰 오동나무와 후박나무도 좌선 중이다. 묵언이란 말에서는 몸짓 언어도 제약을 받는다. 내 몸이 이토록 조심스러울 수가 없다.

선뜻 암자 앞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마당 한켠에 놓여 있는 나무 의자에 앉는다. 암자는 굳게 문을 닫은 채 숙연하고, 댓돌 위에 놓여있는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유난히 고결해 보인다. 흑백영상 같은 소박함이 마음을 따뜻하게 밝힌다. 채워도 채워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덩달아 불안해지곤 했다. 가질수록 두려움에서 놓여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물질뿐만 아니라 무언가에 가치를 두는 순간 그것을 상실할까 두려움과의 동거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후박나무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잎을 날린다. 떨어진 잎은 남김없이 갈색이다. 후두둑후두둑 비 듣는 소리가 일품인 후박나무를 올려다본다. 잘 뻗은 줄기와 무성한 잎에 미련을 두지 않고 버릴 줄 아는 나무의 성품을 닮고 싶었던 걸까. 스님은 일본 목련이라 불리는 잎이 큰 후박나무를 사랑하고 지금 그 아래 잠드셨다.

스님이 손수 만드신 낡은 나무의자, 빠삐용이 주인 없이 외롭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절해고도에 갇힌 빠삐용을 떠올리며 이름 붙였다는 의자 위에는 방명록과 책갈피가 마련되어 있다. 필요한 분은 하나씩만 가져가라는 글귀 앞에서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어디 있는가? 모두 한 때일 뿐, 그러나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 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에서 -

책갈피에 적힌 글이 둔중한 울림이 되어 다가온다. 스님은 세속의 명리와 번잡함을 피해 이곳에 칩거하여 한 달에 한 편의 글로 세상과 소통하며, 청빈의 도를 실천하셨다. 낮고 부드러운 가르침이 불일암 곳곳에 숨어 있다. 스님이 떠난 지도 수년이 흘렀건만 그 온기와 감동은 여전히 그대로다.

 

▲ 순천 송광사 불일암
▲ 순천 송광사 불일암

잠시 고단한 몸을 내려놓고 명상에 잠기고 싶다. 투박한 나무의자에 다시 걸터앉는다. 아무런 감정의 소요나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욕심에 눈이 멀다가 때로는 홀가분해지는 마음, 끊임없이 불행과 고통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내 안에 잠든 에고의 정체는 무엇인가? 침묵 속에서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본다. 두어 차례 사람들이 대숲 터널에서 빠져나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둘러보거나 댓돌 위에 앉아 가을볕을 쬐다 사라지곤 했다.

커다란 후박나뭇잎이 가볍게 낙하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무하도록 간결하다. 그 동안 내 삶은 크고 작은 소유욕으로 점철되어 온 것 같다. 침묵만이 감도는 불일암 마당에서 모처럼 상쾌한 죽비소리를 듣는다. 내면이 고요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은 텅 빈 상태를 갈구한다. 무(無)가 아니라 무궁무진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空)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

바람이 오동나무 잎사귀를 간질이며 지나가지만 미동도 않는다. 대신 도토리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충만한 행복에 빠져 있는 순간 저혈당 증세로 온 몸에 기운이 빠진다. 하늘이 노랗다. 점심시간을 넘기고 오랜 시간을 머문 탓이다. 예측이나 한 듯 바구니 안에 준비되어 있는 쿠키와 비스킷이 나를 구해 주었다. 불일암이 지닌 유일한 소유, 그것조차 가치 있고 아름다웠다.

차고 넘치는 나의 소유는 언제쯤 남을 위한 배려로 이어질까. 애착과 두려움을 버리고 비우고 베풀면서 살아가기를 꿈꾸었지만 늘 제자리걸음이다. 대나무 숲길을 빠져 나오는 동안 무언가의 다짐으로 꿈틀대는 에너지를 보았다. 이번에는 믿어 보기로 했다. 머뭇거리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