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 편집국장

“불교가 지난 50년 동안 사회를 위해 기여한 게 하나도 없다. 육사생도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바쳐 충성을 다한다는 군인정신이 있는 데, 도대체 우리는 `중 정신`이 없다. 이러나 국민이 상구보리(上求菩提·위로 깨달음을 구함)만 있지,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 중생을 교화함)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이 최근 충남 공주 한국문화연수원에서 열린 `종단 혁신과 백년대계를 위한 사부배중 100인 대중공사`(이하 대중공사)자리에서 스님과 신도 등이 모인 가운데 현 조계종의 풍토를 모질게 비판해 화제가 됐다. 대중공사는 자승 총무원장의 선거공약으로 절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전체 구성원이 모여 토론을 벌여 해결책을 모색하는 불교 전통방식을 말한다.

대한불교조계종 행정총책임자인 자승 총무원장은 이날 스님들의 `중 정신`부재와 매너리즘을 질타하며 자신의 이야기까지 털어놨다. 그는“어려서 출가해 정화(淨化·대처승을 절에서 쫓아낸 일)한다고 절 뺏으러 다니고, 은사(정대 전 총무원장)스님 모시고 종단정치 하느라 중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자신이 종단정치만 아는 사판승(事判僧)이란 일부의 비판에 대해 “그래, 맞다. 그렇다고 이대로 후배들에게 물려줄 것인가”라며 되받아친 뒤 “지금 당장은 쇼로 보일지라도 10년, 20년후에 추수한다는 심정으로 씨를 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나라 불교계가 `중 정신`회복을 자정과 쇄신의 출발점으로 찾고 있다면 이 땅의 평범한 백성들은 무엇을 삶의 기준으로 세워 자신을 바로 세울까. 우리 전통윤리 가운데 선비정신을 따라보자. 청렴과 청빈을 우선 가치로 삼으면서 일상 생활에서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선비정신은 조선시대 이래 우리 사회를 떠받쳐온 전통윤리다.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고, 역사 의식에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춘추(春秋) 정신을 신봉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평생 기자생활을 했으니 기자정신을 기준으로 삼는 게 맞을지 모른다. 기자정신은 뭘까. 처음 기자시험을 볼 때 이야기다. 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왜 기자가 되고 싶은가.”그 때의 순진무구한(?) 나는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여러 직업이 있지만 기자란 직업이 사회의 목탁이자 빛과 소금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도덕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게 모범답안인 양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진실을 직시하며,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내가 아는 기자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4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그 때묻지 않은 기자는 어디로 갔나. 스스로 되돌아보고 반성해본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뭔가를 열심히 추구하다보면 종종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의 경우에는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이 많다. 개인은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번다고 하면서 정작 그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일이 많다. 가정에서는 아이를 위해서라고 하면서 입시 공부로 아이를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요즘도 성적을 비관해서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학생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이다.

삶·죽음·인생…. 도대체 알 수 없는 화두를 부여잡고 용맹정진 수도를 해온 스님들 마저 자성의 소리를 내는 이 마당에 나는 얼마나 초심을 지키며 살아왔나 다시한번 자문한다. 돌이켜 선비정신, 기자정신 반 쪽인들 지켜낸 삶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법성게`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正覺)`이란 구절이 있다. 누구나 처음 발심할 때의 마음을 그대로 계속하면 문득 정각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 처음 마음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으로 `처음처럼`소주 한잔 어떠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