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창옥대구수필가협회회장약사
첫눈이 먼저 내리고 바람이 나중에 불었다.

눈은 포근하였으나 바람은 차가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미 함박눈의 군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눈이 한나절 내렸다. 한나절을 나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눈의 밀도가 낮아지고 그 춤사위의 짜임새가 엉성해지더니 시나브로 그치고 말았다.

그때 세찬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이 가로수 플라타너스를 사정없이 후려치니 남은 잎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서 포도 위를 날아다니고 굴러다닌다. 눈의 정취에 취한 건 잠깐인가 싶은데 이제 시작한 바람은 오래전부터 휘몰아친 것 같다. 춥다. 따뜻한 실내에 있으면서도 나는 추위에 떨고 있다. 추위를 몹시 타는 건 내 몸이 태생적으로 습득한 무슨 조건반사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음력 섣달 스무이레 깊은 밤에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 만삭의 어머니는 밤이 깊도록 한 말이나 되는 가래떡을 썰고 있었다. 대가족이 쇨 설날 준비에 몸이 무겁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었단다.

게다가 여섯째로 태어날 아기가 그리 큰 긴장감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오, 핏덩어리 나는 섣달의 추위 속에 느닷없이 던져졌다. 뼈 속까지 스며든 그 추위를 내 몸은 여태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마다 내가 옴짝달싹하지 못할 만큼 주눅이 든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몸이 그렇듯 겨울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음에도 내 정서는 그러나 완연히 다르다.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 특유의 무채색 정경이 좋고 산야가 함께 묵언수행에 들어간 것 같은 일종의 적막이 좋다. 산 너머 혹은 강 건너에 필경은 있을 봄, 옹색하게 움츠러든 모든 상황이 끝나고 말리라는 희망을 표상하는 그 봄을 기다리는 묵연한 인내가 좋다.

몸과 마음이 느끼는 겨울이 서로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미루어 생각하건대 회귀본능이 아닐까한다. 몸이 객지를 떠돌아다닐수록 마음은 고향에 깃드는 법이다. 내게 겨울은 고향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그렇듯이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나도 세모정서에 젖어서, 놓쳐버린 것들을 낱낱이 들추어보며 아쉬워하고, 새해에 이루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내었다. 그리하여 초등학생의 방학계획표처럼 필시 그대로 해내지 못할 계획들을 세우곤 했었다. 그게 나빴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라도 했기에 약진은 아닐지라도 미미한 발전이나마 있었을 게 아닌가.

웬만큼 나이가 들고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채색으로, 적막으로, 묵연히 인내하면서 가만히 섣달을 보낸다.

희망을 품지 않는다고 절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소망조차 없을 수는 없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절감하는 게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비켜설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 나이를 먹자. 나이를 잘 먹자. 나이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순응하자.

`아름답게` `기품 있게` 를 화두로 삼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격이 닿지 않는 난제였다. 젊게 살자, 그 또한 분에 넘치는 그야말로 분수 모르는 일임에랴. 그러니 그저 나이를 잘 먹자고 물러설 수밖에. 가능하면 창밖에 나서서 바람을 안아보자. 피하지 말자. 그 또한 순응이리니. 순순해지자. 편안해지자.

글을 쓰는 동안도 바람은 여전히 플라타너스 가지들을 흔들고, 지나가는 이들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다. 마치 쇼팽의 `겨울바람`이 연주되는 듯 환청이 일어난다. 세찬 바람이 건반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오선지가 휙 날아가고 그 오선지를 물고 있던 음표들이 하나하나 떨어져나가서 작은 잎사귀들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은 환시가 일어난다.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어쩌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 내 문장에서도 바람소리가 났으면 좋겠다는 정녕 꿈같은 생각을 했었다.

눈이 내렸고 눈바람이 불고 있다. 겨울바람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내다보며 내일의 나를 생각한다. 더 순순해지자. 더 많이 편안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