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을 가다
포항시 기북면 덕동 마실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소담한 마을이다. 도시의 갑갑함을 버리고 훌쩍 떠나온 길에서 생명 숲을 만났다. 도하송이 허리를 굽혀 반긴다. 섬솔밭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푸근히 감싸 앉는다. 휴(休). 숲이 주는 치유이다.

호산지당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연못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원시적 신비로움마저 감돌게 한다. 우주를 품은 듯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에 수기(水氣)를 채우면 인재가 많이 난다고 해서 후손들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이다. 벤치가 좀 쉬었다가라고 말을 건넨다. 고마움에 덥석 앉았다. 잠시 무게에 짓눌렸던 인생의 짐을 내려놓았다. 힘 있는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자연 앞에서는 평등한 것을.

“귀거래 귀거래 말뿐이오. 가리업시 그저 말뿐이듯이….”

성공과 출세가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자리를 버리지 못하고 매여 있었던가. 훌훌 던져버리고 자연인이 된다. 이 이상 더 큰 기쁨이 있을까. 거창한 행복보다 소소하게 느끼는 일상적인 여유로움이야말로 청복(淸福)인 것을. 홀연히 가다가 복사꽃 핀 숲을 만나 선경에 드는 도연명처럼, 나도 잠시 넋을 빼앗겼다. 무릉도원이 예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가 여기일까. 아름다움에 취해 영영 길을 잃어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덕동`은 덕이 있는 인물들이 많다고 하여 불린 지명으로 자금산 남쪽 산기슭에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지명에서부터 마을 사람들의 인품이 느껴진다. 남의 일, 내 일 구분 없이 서로 한 가족같이 지내서인지 어르신들의 환한 표정이 여느 동네와 사뭇 다르다. 공유(共有), 공산(共産), 공생(共生)이 숨 쉬는 이상세계, 안생생(安生生) 대동(大同)사회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비운 자들만이 누리고 살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가진 것이 없으니 비울 것도 없지만 부요해지고 싶은 것은 인간이 지닌 욕망이 아닐까. 이곳에서는 꿈틀거리던 욕망마저도 저절로 수그러드는 것 같다. 세상은 크게 보면 다 같을 지도 모를 텐데 내 몫에 눈이 먼다. 명예에 눈을 닫고 욕심을 버리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련만 남보다 앞서 달리려고 한 내 발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농재 이언괄은 형인 회재 이언적이 관직에 나가 있자 어머니 봉양을 위해 물 좋고 산 좋은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자손대대로 이어져 오는 문사의 마을이 된 것이다. 360여 년 동안 후손들은 조상의 뜻을 기리고 아름답게 가꾸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243호 용계정은 정문부의 별장이고, 민속자료 제80호 애은당은 피난처다. 그 외 3량가납도리집인 제81호 사우당, 문화재자료 206호 여연당, 제373호 오덕리 근대 한옥, 덕계서당, 민속박물관 등이 있다. `덕동민속전시관`은 가족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 분재기를 비롯하여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보물창고다.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지 않다. 덕동의 옛 이름은 송을곡이다. 왜병은 `송`자가 들어간 곳은 전쟁에서 패한다는 설이 있어 덕동마을은 피해갔다고 한다. 환란을 당했을 때 임시로 몸을 거처하기에는 여기가 낙양 같은 길지여서 왜병도 피해간 곳이라고 한다. 의병장 정문부 가족도 임진왜란을 피해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민속자료 제80호로 지정된 애은당이 정문부가 기거한 고택이다.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포항시 기북면은 문헌상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부곡의 옛터가 국내 최초로 확인된 곳이라고도 한다.`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법 부곡` 현장이 주변 마을에서 확인되고 있다. 신라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제철과 연관된 철물기구와 무기 생산 공장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까이에 있는 `벼슬재`는 벼슬을 가진 이들 외에는 넘지도 못했다고 한다.

 

▲ 호산지당
▲ 호산지당

용계정 앞에 섰다. 잠시 검문을 하려는 듯 통허교가 신호를 보낸다. 고고한 선비들의 넋이 세속의 먼지 묻은 사람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아 머뭇거리다 신발을 털고 정각에 들었다. 수려한 경관이 눈을 홀린다. 벼랑 암벽 위에 세운 정각 앞으로 용이 노닐다 비상했다는 계천이 흐르고 솔숲과 연못이 아우르고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마루에 누워 있으면 물소리가 달빛에 어우러져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라고 한다. 나도 어느 사이 사람들 틈에서 와유(臥遊)를 즐기며 곡수에 술잔을 띄워 본다. 하늘 한 자락이 지붕 위로 내려앉는다.

`사의(四宜)`는 용계정의 옛 정각 이름으로 농재 이언괄 선생의 4대 손인 사의당 이강이 착공했다. 사의(四宜)는 사계절 변함없는 만상의 조화를 뜻한다고 한다. 마음이 몸 밖으로 도는 것을 경계하고, 눈이 끌리는 곳에 무릎 꿇지 말라는 섭심(攝心)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가정해 본다. 이강은 솔숲을 거닐면서 소나무의 푸른 절개와 기상을 닮고자 했으리라. 선비가 지켜야 할 도리 앞에서 때론 자신도 풀 같이 흔들리는 나약한 범인(凡人)임을 생각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채찍질한 사의혼(四宜魂)이 그의 아호인 사의당(四宜堂)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속 일을 멀리하고 심부를 다스려 후학에 힘쓰는 것이 진정한 선비정신임을 알고 몸소 보이려 했던 것이리라.

물질의 풍요와 편리를 다 누리고 살면 오히려 독이 되니 적당히 억제하며 사는 것이 이롭다는 가르침을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리라. 조상들이 남긴 숨결에서 큰 깨우침을 얻는다. 나는 후세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문화유산을 곱게 물려주기 위해 애써 가꾸는 덕동마을 사람들의 사의정신(四宜精神)을 가슴에 고이 담는다.

배웅하는 도하송을 뒤로 하고 숲을 빠져 나왔다. 아쉬움에 걸음이 느릿해진다. 휴(休). 숲도 나를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자꾸만 등에 기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