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낭희 수필가·인문학 강사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기다림을 통해 자기를 반추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며 내면을 성숙시켜 나간다.

부처님 앞에서 지극 정성으로 자식의 앞날을 비는 부모의 간절한 기다림이나 시간을 공유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는 연인들의 애틋한 기다림, 흐르는 세월 속에 상처가 아물기만을 바라는 체념 섞인 기다림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오지 않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며 평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큰 기다림 앞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의연하게 대처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은 시간의 족쇄에 묶여 노예처럼 살아가기 십상이다. 약속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는 초조해 하기 일쑤다. 느긋하게 시간을 깔고 앉아 여유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신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기다림은 결과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다리는 모습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직업까지 어느 정도 감지될 정도이다.

평소 나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인생의 깊이를 제대로 모르는 경박한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작 나는 스스로에게 몹시 실망했던 적이 있다. 지난 스승의 날 대학 동기들과 교수님을 뵙기로 하였다. 교수님을 뵐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조촐하게나마 예를 갖춰 식사 대접을 한다고 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의 변화된 모습을 그려보며 아침부터 묘한 설렘을 안고 허둥거렸다. 바쁜 일과를 서둘러 마치거나 뒤로 미루어 놓은 채 일찌감치 약속 장소로 향했다. 텅 빈 예약석에 교수님 혼자 계실 것을 우려하여 십여 분 일찍 도착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방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들을 기다린다. 가끔씩 지나치는 종업원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모처럼의 고독을 즐긴다. 이 정도에서는 누구나 우아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7시를 넘기면서 옆 테이블에 손님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술렁거리는 주변 분위기 속에 혼자만 고독한 섬마냥 머쓱해진다. 갑자기 모든 것이 어색하다.

약속 시간을 넘기면서부터 자꾸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거슬린다. 멀뚱거리며 시간만 축내는 하릴없어 보이는 주부로 비쳐지는 것까지는 괜찮다. 이 옷 저 옷 걸쳐 보고 수도 없이 화장을 고쳐대며, 모처럼의 외출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삼류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비쳐지진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고통스러워져 온다.

나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친구들의 늑장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하다가 서둘러 온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불안감까지 파고든다. 약속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교수님도 오늘따라 웬일이실까? 혹시 건망증이 심한 내가 착각을 한 건 아닌지 테이블 밑으로 조심스레 수첩을 펴본다. 장소와 시간 모두가 정확하다. 그 때 낯익은 낱말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나를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 7시까지!

바쁜 도시 생활에서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린 `까지`라는 흔한 조사 때문에 이십여 분이 이토록 불안했던 걸까. 언제까지 말미를 주겠노라고 흔히 소설 속에서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내뱉는 말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말이 아닌가. 나는 수첩을 뒤져`7시부터`라고 고쳐 적었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읽을거리가 없는 것도 다행이라 위안했다.

여기까지 와서 볼썽사납게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것조차 우습지 않은가. 간간이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왁자한 웃음소리가 정겹다. 기계처럼 정시에 만나 필요한 말만 나누다 뿔뿔이 흩어지는 만남을 상상해 본다. 습관적으로 출입구를 향해 눈길을 돌릴지라도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마음이 편안해져 갈 때 교수님이 환한 웃음으로 들어오신다. 뒤이어 친구들도 약속이나 한 듯 차례차례 나타난다. 혼자만 촌각을 다투며 살아온 것처럼 호기를 부리던 모습을 잊고 나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부터`와 `까지`의 차이로 맛본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행복했던 그 순간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조낭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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