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

지난 일요일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포항남구와 울릉군의 당원들 행사에 참여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필자는 김 대표가 큰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배경엔 훌륭했던 부친의 피를 물려 받은데다 부친이 생전에 남긴 큰 발자취의 후광이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김 대표는 이날 “여당의 대표가 되어 고향에 금의환향하게 되어 기쁘다”고 고향방문의 소감을 밝혔는데, 필자 역시 김 대표의 마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김 대표의 부친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포항의 근대화 과정에서 적잖은 영향을 끼친 해촌 김용주(1905~1985) 선생이고, 그의 형은 전방(주)과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지낸 김창성(83) 회장이다.

해촌 선생이 포항과 깊고 오랜 인연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23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포항의 조선식산은행 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부터다. 당시 포항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어촌도시에 불과하였고, 대부분 어업 종사자들은 단순히 고기를 잡는 일이 전부여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해촌 선생은 이러한 어업 환경에서 산업화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1926년 20대 초반에 독립을 결심한다. 그리곤 곧바로 `삼일상회`를 설립, 어업의 길을 걸었다. 상호는 3.1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어업에 종사하다보니 수산물을 대도시로 운송할 수단이 필요하였고, 해촌 선생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대 중반에 운수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가 포항지역 운수업의 효시다.

해촌 선생의 사업 수완은 남달랐다. 동빈동에 포항 최초로 들어선 비누공장도 혜촌선생이 설립했다. 당시 영일만 일대 근해에는 정어리와 청어가 많이 잡혔다. 정어리가 얼마나 많이 잡혔던지 생선 취급을 받지 못했다. 현재의 송도다리 건너 좌측에 일본인이 경영했던 정어리기름공장이 있었는데, 당시 정어리가 얼마나 흔한 생선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정어리기름은 주로 식용과 함께 비누 및 약품 제조 등에 이용되었는데, 해촌 선생이 이 정어리기름을 활용하여 비누공장을 설립했던 것이다.

해촌 선생은 지역의 근대교육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어쩌면 이는 해촌 선생이 후대에까지 길이 존경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선생은 20대 초반부터 포항청년회 독서회를 만들어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조선인 학생들을 무료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언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특히 해촌 선생이 포항에서 자주 회자되는 것은 거액의 사재를 털어 구 제일교회 앞에 소재하였던 영흥학당을 정규과정의 영흥보통학교로 만든 장본인이어서다. 포항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였던 이 학교는 해방이 되면서 공립학교로 헌납됐으나 개교 100년을 훌쩍 넘겨 그동안 많은 인재를 배출해 냈다.

해촌 선생은 20대 초반부터 지역경제를 비롯하여 지역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손대는 것은 포항서는 모두가 최초이다시피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지평선이 하나 둘 열렸다. 지금까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혜촌 선생을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또 교육자로, 정치인으로 높게 생각하는 것은, 선각자라는 이런 배경이 뒤에 있다. 앞으로도 포항 현대사에서는 해촌 선생을 빼놓고 이야기하기란 어렵다.

해촌 선생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도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쌍용그룹 창업주인 고 김성곤 회장(1913~1975)의 결혼이다. 해촌 선생은 이 결혼식의 주례를 맡았는데, 이 결혼식이 포항서 큰 화제를 모은 것은 포항 최초의 신식 예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식결혼식은 해촌 선생이 권유, 성사시켰다. 신식 결혼식의 첫 신부가 되었던 김 회장의 부인은 흥해 출신으로 당시 영흥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해촌 선생이 연결해 줬다. 포항 최초의 신식 결혼식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겠지만 노인들이 이전의 전통혼례와 달리“새색시 얼굴 실컷 봤다”며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파격적인 사건들은 이렇듯 대부분 해촌선생이 주도하며 이끌었으니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촌 선생은 해방 이후인 1948년에 한국해운공사를 창립하여 해운업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1950년에는 미군정 하에 있던 일본에 주일 한국외교사절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0년에는 부산에서 참의원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민주당의 원내총무를 맡는 등 한때 한국 정치를 이끌기도 했다.

포항은 물론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해촌 선생이 1985년 운명을 달리하자 우리 정부는 선생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김 대표의 형인 김창성 회장도 지난 1991년 필자가 건설부 과장으로 재임할 당시 재경의 고향 지인들과 포항향우회와 영일향우회를 통합한`재경포항향우회`를 발족시켰는데, 그 초대회장을 맡아 고향 향우회가 빠르게 자리를 잡고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