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읍 관음리 마실

▲ 문경을 대표하는 가마터인 관음리 뇌암요. 뇌암요의 창시자인 고(故) 토암 김성기 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 문경을 대표하는 가마터인 관음리 뇌암요. 뇌암요의 창시자인 고(故) 토암 김성기 선생의 사진이 걸려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계절. 내가 쓸쓸할 것 같아서 사 들고 왔다는 지인의 국화꽃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담이라도 훌쩍 넘어 나락 익는 냄새라도 맡고 와야 할 것 같다. 가을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운 건 그가 주는 상처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경은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고 내 어린 날 추억이 있어서 그립다. 그렇다고 전화를 걸면 신발 벗어들고 쫓아 나와 반겨 줄 이는 없다. 모두 이 모양, 저 모양 사는 것이 바쁘다. 시간을 내서 차라도 한잔 나누는 친구는 정말 고맙다. 친구를 만날 때면 주머니는 되도록 내가 여는 편이다. 얼마 안 되는 찻값이나 식사비로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다. 살아오면서 내가 지키는 철칙이다.

문경 능이족살찌개 집에서 지인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토암 김성기 도예가의 자제분인 토암 2대 김대진 선생이다. 도예가와는 두 번째 만남이다.

능이족살찌개 속으로 가을이 익는다. 다른 건 먹지 말고 검은 것만 골라 먹으라 한다. 쫄깃하면서도 향이 특이하다. 아직까지 인공재배가 되지 않는 버섯 중의 왕이라 불리는 능이버섯이다. 다량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고, 영양 가치와 약용으로 인기가 높다.

족살은 족발에 붙어 있는 살을 말한다. 족살에 능이와 두부를 넣고 끓인 것이 능이족살찌개이다. 문경은 관광지라서 그런지 특이한 음식이 많다.

관음리 마실은 하늘재 바로 아래에 자리해 있다. 수백 년 전부터 생활도자기를 생산하던 곳이다. 안동 김씨 후손이 살던 곳으로 선조들이 세상의 어지러움을 피해 은신하며 생계수단으로 도자기를 굽던 것이 대를 잇게 되었다. 지금도 자손들이 대를 이어 도자기를 빚고 있으며 오래된 가마터도 둘러볼 수 있다. 도자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더러 있어 나들이하기에 좋은 마실이다.

그중에서도 관음리에 있는 뇌암요는 진사, 천목, 분청사기로 유명하다.

김대진 선생의 부친인 토암 김성기 선생이 뇌암요의 창시자이다. 문경읍에서 관음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황정머리가 나온다. 우회전해서 2km 정도 가면 뇌암요를 만날 수 있다. 뇌암은 꼭두바위란 뜻이다.

김성기 도예가는 9세에 입문하여 전통 도자기의 생산과 전수에 평생을 받쳤다. 이 시대 마지막 전통 민요 도예가이다. 단순히 옛것을 본뜨는 데 그치지 말고 계속 연구, 개발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전에 말씀하셨다.

우리의 전통 도예가 발전하려면 책에 나와 있는 형태를 모방하는 방식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작품도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의 결과였다고 말한다.

한평생을 닦아온 부친의 기술을 고스란히 김대진 선생이 전수받았고 뇌암요의 2대 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대진 선생은 군대 제대를 하고 경찰관이나 직업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1989년부터 가업을 계승하게 되었다. 도자기 유약 진사, 천목을 특허 출원하였으며 각종 공예대전에서 많은 입상을 한 경력이 있는 도예가이다.

감사패 및 주간지에 게재되는 등 개인전을 비롯하여 오사카 문경 도예 9인전을 열기도 했다. 가장 전통적인 한국미를 지닌 도자기 명장으로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가마 옆에 동그란 돌이 많이 쌓여 있다. 일본말로는 `사야`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개비`, `개피(蓋皮)`라 불러요. 다완을 한 개씩 놓으면 공간을 많이 차지하잖아요. 그래서 개피를 놓고 다완을 얹어요. 또다시 개피를 넣어 폭 포개는 그라요. 그러면 한꺼번에 많이 구울 수 있어서 연료비를 절감해요. 개피는 탁한 불기운을 막아주는 역할도 해요.”

“뇌암요의 특색은 무엇인가요.” “일반 백자와 달리 진사, 천목, 분청사기가 많지요. 뇌암요는 천연재료인 재와 혼합해서 사용해요. 유약은 불에서 녹으면 흘러내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는 화공 약품으로 처리된 것을 사용해요. 그래서 이중 색상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거라요. 뇌암요는 천연성분을 사용하기 때문에 유약이 흘러내리는 그대로의 자연미가 있다고 볼 수 있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뇌암요 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진사는 도자기 유약 중에 동을 환원 소성하면, 적색이 되고, 산화 소성하면 녹색이 된다. 그때 동을 환원 소성해서 나온 적색 도자기를 진사 도자기라고 말한다. 기원은 고려 시대 청자를 환원 소성하면서 함께 쓰였던 기법이다.

자연에서 얻은 유약으로 빚어서 그런지 진사의 불그스름한 빛깔은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천목 설경 항아리에는 눈꽃이 피었다.

▲ 김근혜<br /><br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한국인에게 가장 친근감이 가는 백자의 은근한 매력도 놓칠 수 없는 미학이다. 도예가의 맑은 기운은 자연을 그대로 쏙 빼닮았다. 도공의 혼과 숨결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조화로움을 더한다.

김대진 선생이 빚은 천목 다기에 녹아든 다향이 그윽하다. 도공의 혼이 실려 맑고 은은하다. 일렁이던 번뇌도 가라앉고 욕망도 잠든다. 이제 뇌암요의 가업을 계승할 3대인 김명한 씨도 군 복무를 마치고 강원대 도예과 3학년에 복학 중이다. 희망의 씨앗을 심고 있는 그에게 응원을 보낸다.

자연을 연주하는 도예가와의 만남에서 건조한 내 삶을 돌아본다. 한 번쯤 이런 산속에 푹 파묻혀 자연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풀어놓고 싶다. 창밖으로 보이는 늦게 핀 사과 꽃도 도공이 빚어놓은 예술품 같다. 자연산 호두 한 주먹을 얻어서 돌아오는 길, 문경의 인정이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