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계간 문학지 `ASIA` 발행인

대학 3년(1979), 나는 혼자서 한강으로 나가곤 했다. 술을 마시거나 강가를 따라 걸으며 시를 쓰는 청춘의 한 절기가 비틀비틀 지나가고 있었다. 한번은 오지게 오줌을 갈기고 `방뇨`란 시를 썼다. “해맑은 가을 한낮/한강에 오줌을 갈기노니/일 주일 뒤 내 생일 아침/하숙집 식탁에 오를 숭늉이어/제발 내 오줌이길 비노라/아니면 오줌이어/목쉬고 캄캄한 강물의 노래에 스몄다가/저 노래들이 먼 바다에 모여/기어이/검은 바위로 솟아오를 때/새똥에 섞여온/풀씨 한 톨 뿌리 내릴/옥토 한 줌을 일구어다오”

며칠 뒤에는 광화문에서 엉망으로 취했다. 길거리 고성방가와 방뇨…. 파출소에 끌려갔다. 취중기세는 더 부풀었다. 유신독재를 비방했다. “오, 묘한 액체여, 기고만장한 허세여, 비겁하고 남루한 용기여, 그러나 술병의 주둥이 같은 숨구멍이여!”

보잘것없는 사건이 어떻게 구상(1919~2004) 선생의 귀에 들어갔을까. 아마도 지도교수의 이름을 대라는 경찰의 요구에 내가 당신의 존함과 댁 전화번호를 불렀을 것이다.

고교 시절의 나는, 시(詩)란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 신묘한 성(城)처럼 저 아득한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휘청거리는 걸음을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그 청년이 간신히 대학의 문지방을 넘어서자 보듬어준 스승이 구상 시인이었다. 시 쓰는 청년시절을 나는 누에처럼 당신의 섶에서 뒹굴었다고, 지금 고백해도 거짓이 섞이진 않겠다.

짧은 동안 광화문 귀퉁이를 휘저은 그 밤, 나는 종로경찰서 둥근 유치장에 갇힌 다음에야 갈증을 느꼈다. 물론 즉결재판소로 넘겨졌을 때는 정신이 초롱초롱했다. 잡동사니 사내들 틈바구니에 끼여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내 이름을 들었다.

“판사하고도 토의를 했어. 오해는 없을 거다” 구상 선생이 지갑을 꺼냈다. “사식이 필요할 거다” 말씀과 지폐 석 장을 나는 받았다. 스승의 사랑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 순간, 인사도 안 받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당신을 내가 큰 소리로 불렀다. “선생님, 이거요. 한번 봐 주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건넨 것은 빌린 볼펜과 종이로 쓴 시 한 편이었다. 아주 뒷날에 당신은 이 장면을 두고 `이대환은 천성의 시인`이라 썼다.

유치장에서 엿새를 더 보낸 나는 충남 공주의 친구(요절한 정영상 시인) 자취방으로 내려가 며칠을 퍼마시며 놀았다. 자금은 당신의 돈이었다. 유치장에서 사식은 한 끼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로 돌아와서야 알게 된 사연이지만, 구상 선생은 내가 종로경찰서로 넘겨진 그 밤에 이른바 `시국사범`으로 오인되지 않도록 하려고 치안의 고위와 긴 통화도 했다.

그해가 저물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 당한 한국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어도 문학청년에겐 신춘문예 절기였다. 나는 서울 일간지에 시를 응모했다. “오뚝이를 바라보면 도립의 욕망이 끓어오르고/내가 물구나무를 서 있는 것처럼/똑바로 선 그가 불안하고 힘겨워 보인다” 이것이 내 회심작의 첫 연이었다. 고향집으로 전보가 오지 않았다. 새해 첫 신문을 살폈다. 내 회심작은 최후 두 편에 거론됐다. 심사위원은 구상 시인과 김구용 시인이었다.

새봄에 구상 선생이 나를 학과 사무실로 불렀다. 시큰둥해 있는 제자에게 당신이 따뜻하게 말했다. “김구용 시인이 둘 중에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쪽을 주자고 해서 대환이는 미뤄야 했어. 너무 일찍 데뷔해도 좋을 게 없어” 나는 꾸벅 절을 올리고 돌아섰다. 이미 내가 장편소설을 현상공모에 던진 뒤였다. 신춘문예에 낙방하고 열을 받아서 겨울방학 두 달 동안 수험생처럼 덤벼들어 두툼한 대학노트를 깨알 글씨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 작품이 4월에 당선 전보로 돌아왔다. 졸지에 나는 `소설가`가 돼 버렸다. 마침 내 안에는 `작가와 시대`에 대한 작가의식의 맹아(萌芽)가 돋아난 참이었는데, 내 삶은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오랜 술친구인 구상 시인. 5·16 직후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을 마다했고 뒷날에는 장관직도 사양했으나, 그가 무참히 세상을 떠나자 추모시를 바쳤고 “독재자에게 시를 바치다니”라는 돌멩이들에도 “친구니까”라며 웃어넘긴 구상 시인. 오늘, 그 스승이 몹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