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긴 사연` 로제 그르니에 지음 문학동네 펴냄, 208쪽

프랑스 문단의 원로 로제 그르니에(94)의 신작 소설집 `짧은 이야기 긴 사연`(문학동네)가 번역 출간됐다.

지난해 발표한 `짧은 이야기 긴 사연`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보듬어주다가도 불시에 폐부를 찌르며 공격해오는 열세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지나온 삶을 반성하며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노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 광고판을 등에 지고 진종일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인 샌드위치맨, 유년 시절에 처음 만나 인생이 저물어가는 날까지 삶의 행로가 마주치고 갈라지기를 반복하는 두 남녀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에 사랑에 대하여 건네는 이 작가의 담담한 소회 앞에 어쩐지 마음이 애잔해지고 만다. 작가는 기나긴 인생의 사연들을 고요하고도 깊은 시선으로 가만가만 짚어낸다.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발령지에서 어렵게 사귄 친구의 아내와 부정(不貞)을 저지르고 결국 다시 또 외톨이가 되는 기상학자,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며 반성하다 스스로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지만 그마저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노인, 독일 점령에서 파리가 해방되던 그때 주어진 임무는 수행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총각 딱지를 떼게 된 청년, 매일 밤 첼로를 등에 메고 홍등가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첼로 연주자,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을 광고하는 샌드위치맨이 되어버린 시인 동료를 바라보는 통신사 기자, 파란 많은 인생행로의 끝에 유랑극단의 단역배우가 되어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여배우, 유년기부터 인생이 저물어가는 날까지 닿을 듯 닿지 않고 인연이 끝나버리는 두 남녀….

`짧은 이야기 긴 사연`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다양하지만 한편으로 조금씩 닮아 있다. 어딘지 조금은 모자란 듯하면서도 외로운 인물들이다. 로제 그르니에는 소설 속에 거창한 인물들을 내세우지 않는다. 격정적인 감정을 폭발하는 인물도, 당장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도 없다. 그는 제법 단순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이야기를 나직나직 들려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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