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182쪽

▲ 한병철 교수

2012년 최고의 인문서로 꼽힌`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책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가 번역·출간됐다.

`시간의 향기`(2009)는 `피로사회`(2010)의 전작으로 현대사회에서 모든 시간이 노동의 인질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모든 시간은 일의 시간이고, 여가시간도 일의 시간을 준비하는 보조적 의미밖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

왜 나는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그토록 바쁘게 지냈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나는 주어진 많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성찰이다. 또한 우리가 직면한 시간의 문제들이 결코 효율적인 시간 관리 기법 같은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한병철 교수에 따르면, 오늘의 시간은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됨으로써 위기에 봉착해 있다. 오늘날 시간의 흐름은 자연적 순환과 같은 리듬도, 미래의 구원이나 종말, 또는 진보라는 의미 있는 방향성에서 오는 서사적 긴장감도 상실해버렸고, 그저 끝없는 현재들의 사라짐으로써 체험될 뿐이다. 그리하여 지속성의 경험은 매우 희귀한 것이 됐다. 이에 따라 개개인의 삶도 이렇게 분산된 시간 속에서 산만하게 흘러간다. 즉흥적인 시작과 중단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삶은 완결되지 못하고 불시에 끝나버린다.

한병철 교수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근대 이래 계속 강화되어온 “활동적 삶의 절대화” 경향에서 찾는다.

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직 일하는 자, 활동하는 자라는 사실에서 밖에는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키고 변화시키는 노동만이 인간에게 궁극적 자유를 가져온다는 헤겔-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그 극명한 표현을 얻는다.

 

활동적 삶의 절대화는 시간에 대한 관념에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간은 어떤 리듬도 어떤 질적인 특징도 없는 양적인 단위일 뿐이며, 가능한 한 단축시켜야 할 비용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향기 없는 시간”이다.

속도에 대한 신앙은 여기서 탄생한다. 시간은 비용이기 때문에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증, 무엇이든 앞당기고자 하는 욕망이 지배적인 심리로서 자리 잡는다. 게다가 그러한 심리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린다는 느낌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의 향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한병철 교수는 활동적 삶 중심의 가치관을 사색적 삶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일한다. 나는 활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근대 이후를 지배해온 가치관이었다면, 한병철 교수는 이를 `나는 일하지 않는다, 나는 멈춘다, 고로 존재한다`로 전도시킨다.

멈춤의 시간, 활동하지 않고 자기 안에 머물며 영속적 진리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 이때 인간은 진정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머무름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기다림을 참지 못하는 태도, 그 조급증의 문화가 `빨리 빨리`라는 개념이 되어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한국 사회에서 머무름의 기술, 멈추어 서서 사색하는 능력은 반드시 장려되어야 할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

`시간의 향기`의 주요 테제들은 헤겔, 마르크스, 니체, 프루스트,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료타르 등의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서 도출된다.

짧은 분량이지만 이러한 근현대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논의는 간명하게 요점을 짚어주면서도 깊이를 잃지 않는다.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보리수 꽃잎차에 담근 마들렌의 향과 맛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중국의 시계 `향인(香印)`에 대한 분석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며, 여기서 일깨워진 지속성의 감각은 하이데거의 토착성과 정주의 철학에 대한 아름다운 서술로 이어진다.

한병철 교수의 저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일 철학계를 넘어서 더 넓은 독자층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주요 미디어 전체가 그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는`피로사회`부터였다.

`시간의 향기`는 `피로사회`의 전작으로서 출간 당시에는 `피로사회`만큼 독일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 됐다. (현재 독일에서 7쇄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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