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

내일은 박태준 회장 서거 1주기다. 오전의 국립 서울 현충원 추모식에 이어 오후에는 포스코센터에서 부조(浮彫) 전신상 제막식과 `박태준 사상, 미래를 열다`라는 책의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인생의 황혼을 거니는 한 찰나를 재현한 그 벽에는 6천 쪽이나 되는 `박태준 어록`에서 연대별로 뽑은 그의 말도 한글과 영어로 새겨두었다. 모두 여섯 문장이다.

1969년 12월 “조상의 피의 대가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해야 합니다” 이 말은 영일만 신화의 핵이었던 우향우 정신이다. 1977년 5월 “우리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해 순교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세대입니다” 순교자적 희생,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1986년 3월 “포항공대 설립은 먼 훗날을 위해서, 국가 장래를 위해서 큰 힘이 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과학기술이 뒷받침하지 못하면 일류국가가 될 수 없다는 신념이 박동치는 말이다.

1997년 11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은 우리의 시대적 소명입니다.” IMF사태(외환위기)를 예견하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연대했던 외침이다. 김대중을 당선시켰지만 그때 그의 외침은 고독했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여전히 그 갈등과 반목의 질곡에서 헤매고 있으니, 그것은 박태준의 선견지명이었다. 2010년 1월 “한 나라가 일어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힘은 지도층이 부패하지 않는 것과 국민이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하노이국립대학 특별강연에서 베트남의 젊은 엘리트들과 교수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기립박수와 감동의 눈물이 답례로 돌아왔던 그 교훈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절실한 가르침이다. 2011년 9월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에, 조국의 현대사에 별처럼 반짝인다는 사실을 우리 인생의 자부심과 긍지로 간직합시다” 퇴역한 초창기의 현장 직원들과 19년 만에 재회한 그 자리가 그의 마지막 연설이었다.

말은 그의 생각이고 사상이다. 그러나 언행일치, 지행합일이 없는 말(사상)은 그냥 관념일 뿐이다. 박태준의 위대성은 사상이 복잡하고 정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실천하여 위대한 공적으로 실현했다는 것이다. 박태준 사상은 캄캄한 절망의 시대에 희망찬 미래를 열어젖히는 횃불이 되고 빈곤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삶과 어록을 연구해 1주기에 나온 책이 `박태준 사상, 미래를 열다`로 총 450쪽에 이른다.

교수 다섯 명이 쓰고, 나는 엮은이 역할이었다. `박정희와 박태준`의 만남을 임진왜란 때 `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과 같은 `위대한 만남`이라 했던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사회학)는 박태준 사상을 “선비사상을 행위규범으로서 실천한 현장의 선비사상”으로 체계화했고,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철학)는 “박태준의 결사적인 조국애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부름에 결사적으로 응답한 것”이라 했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개인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성취와 승리라는 거시구조적 맥락에서 영웅 박태준을 위치시켜야 한다”고 규명했으며, 김왕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박태준의 제철보국 이념은 주체적 자율적 내발동력의 원천”이라 했다. 백기복 국민대 교수(경영학)는 “박태준의 경영사상은 하나의 독립된 경영사상으로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요건들을 다 갖추었다”고 증명했다.

“임자가 맡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없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어. 그러니 임자가 맡아” 이것은 1967년 대통령 박정희가 대한중석 사장 박태준의 어깨 위에 종합제철소 건설의 책임을 얹어주며 했던 말이다. 박태준을 골라낸 박정희의 형안은 빛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5년 뒤의 개천절, 광양제철소까지 완성해 포스코를 세계 최고 철강기업으로 육성한 박태준은 서울 현충원의 박정희 유택 앞에서 눈물 젖은 `임무완수 보고`를 올렸다. 우리 현대사에서 송복이 말한 박정희와 박태준의 `위대한 만남`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지금, 박태준은 박정희의 이웃으로 누워 있다. 황혼을 거니는 시절에 그가 늘 소원했던 대로 과연 두 사람은 어느 주막에서 해후하여 기나긴 이야기를 나누며 며칠에 걸쳐 막걸리를 나누었을까. 하늘이 무심하지만은 않으니 그만한 소원이야 들어주지 않았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