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

석가모니 부처는 북인도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맨발로 걸어서 1천km도 더 떨어진 중인도, 지금도 유장하게 흐르는 갠지스 강 허리를 낀 바리나시(사르나트)에서 첫 법을 설 하시고 불국의 세계를 열었다.

2500년 전 세상을 떠난 부처는 지금도 허름하기 짝이 없는 1.5km의 농로 길을 따라 천문대처럼 둥근 창을 두른 인도 쿠시나가리 열반당에서 황금색 법의를 덮고 누워 계신다.

아난다 등 몇 제자들과 열반 여행길에 나선 부처는 고향 카필라를 100km쯤을 앞두고 대장장이가 올린 공양을 들었다. 상한 음식임을 미리 알은 부처는 다른 비구를 줄 것 없이 모두 가져오라고 욕심을 부렸다.

부처는 심한 식중독으로 고향 히말라야의 흰 눈이 보이는 열반당 언덕까지를 25번이나 걷고 쉬고를 되풀이해서 올라서는 마지막 숨을 놓으셨다. 고향을 지척에 둔 길이었다.

덧없는 세월을 버리시고 여전히 미소를 뛰고 계시는 부처는 5세기쯤에 조성된 키 6.5m의 열반상이시다. 서쪽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례자들의 가슴은 마치 방망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부처의 맨발을 붙들고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낸다. 부처의 법을 전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 있던 마하가섭이 스승의 부음을 듣고 달려와 관을 붙들고 울었을 그 모습들이다.

수미산에서 발원한 갠지스는 더 넓은 인도 내륙을 관통, 인도양으로 흘러든다. 강물은 바다로 가는 것이 본성이라면 인간은 죽음이 끝이다. 막히면 넘고 독극물에 먹혀 사경을 헤매면서도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는 것이 강의 생명이다.

생사를 넘나들고 선악을 품고 애증을 포용하고 기다리면서 흐르는 것이 인생살이와 흡사하다. 갠지스 허리를 낀 바리나시(사르나트)를 초전지로 선택한 부처의 마음도 같았으리라.

길고도 먼 수행 길을 떠난 수도승의 마음은 이 보다 더했을 터. 강물의 마지막은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닷물은 억겁의 세월을 머물러도 신통하게도 썩지 않는다. 저 하늘처럼 늘 푸르다. 다시 긴 여정을 가고 싶어 하는 강물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생명체다. 그 생명체는 질 푸른 바다이고 여기서 윤회가 태동되고….

불교 공부는 어렵긴 하지만 깨치면 바로 대성인이 된다. 그 깨치는 수단이라는 것이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 언어로서 표현하지 못하는 곳까지 마음이 다가서야 뭔가 보인다고 한다.

4세기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 온 시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부족 공동체 수준이었다. 나라간 경계선으로 인해 싸움도 없었으니 영토를 넓히기 위한 싸움은 더욱 없었다.

더욱이 황하 등 4대 문명 발상지에서는 4세기 이전부터 찬란한 왕국문명이 꽃피었던데 비해 한반도는 크게 뒤쳐져 있었다.

그런 한반도에 4세기 말 무렵 중국을 통해 불교가 들어왔다. 이 때 들어온 불교 경전과 문헌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세계관을 갖출 수 있었고 왕국다운 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불교문화는 통일신라와 고려로 이어졌으나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유교에 밀렸지만 민중의 가슴에 남는 종교로, 왜란 등 국가위기 때는 승병으로 거듭나서 호국불교의 위치를 이어왔다.

한국불교는 늘 민중의 가까이에 서 있었다. 조선시대 500년간의 숭유억불억압에도 불교는 민중의 삶속에 살아 있었고 많은 문화 예술품을 남겨 민족의 긍지를 살렸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불교·개신교·천주교·원불교·대종교·이슬람교 등이 각자의 교세를 자랑, 세계적으로 보기드믄 다종교 사회가 됐다. 심지어 국민의 것으로 해석되는 전파마저 다종교 방송으로 인해 하늘에서도 격렬한 포교 정쟁을 벌이는 국가다. 이러다보니 포교와 교세확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아졌다. 정장식 전 포항시장 등 개신교 정치지도자가 내뱉은 성시화 발언은 지금도 회자되고있다.

정부와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워왔던 이런 시기에 천만 불자를 이끄는 조계종에서 스스로에게 회초리를 들고 종교간 이해와 평화를 다짐하는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21세기 아소카 선언`을내놨다.

아소카는 기원전 3세기 인도를 통일시키고도 전쟁에 대한 회의에 빠져 불가에 귀의, 불법을 전하는데 앞장서 룸비니 등 곳곳에 다른 종교를 같이 알리는 석주를 세웠다. 한국의 절에서 말하는 법륜성왕이 곧 아소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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