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교수 일행이 보내 온 편지는 장기 뇌성산 뇌록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뇌성산에서 채취한 뇌록으로 얻었다는 색채를 금락두 선생은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은은한 녹색의 부드러운 색조를 피워 올리는 그것은 우리 고유한 단청의 바탕색 그대로였다. 잊히우는가 싶었던 뇌록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었다. 놀랍게도 장기 뇌성산 뇌록에 관한 여러 문헌의 기록도 이런 저런 경로로 찾아왔다.

각 지역의 토산품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에서 뇌록이 공물로 명시된 곳은 유일하게 경상도 장기현 뿐이었다. 조선후기에 작성된 모든 건축 공사 관련 문헌도 뇌록을 경상도 뇌성산에서 조달했다는 흔적을 보여주었다. 순조 5년(180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 창덕궁 인정전을 다시 짓는 공사 기록)에는 갑자(甲子) 2월 경상감영(慶尙監營)에 보내는 공문에 뇌록 20두(斗)를 장기현에서 조달할 것을 명령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또한 순조 30년 (1830년)에는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경희궁에 내전을 다시 짓는 공사 기록)에도 경인(庚寅) 3월 경상감영에 뇌록 500두(斗)를 장기현에서 조달할 것을 명령한 내용과 순조 34년 (1834년)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 창경궁 내전을 다시 짓는 공사 기록) 역시 신묘(辛卯) 7월 경상감영에 뇌록 700두(斗)를 보낼 것을 명령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경복궁 근정전은 정궁이면서도 고종이 황제로 선포되기 전에는 문과 문살에 뇌록을 칠하지 못하다가 황제로 선포한 다음에 비로소 뇌록으로 칠하였다고 하니 경복궁을 복원할 때 까지도 장기 뇌성산의 뇌록 채굴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한 두(斗)를 약 한 말의 양으로 가정한다면 뇌성산이 품었던 뇌록은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음을 짐작케 했다.

단청의 역할은 외면적으로는 건축물의 표면을 다양한 색상으로 칠하여 장엄하며 권위와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온습도의 변화에 의해 목재의 노화와 부후를 방지하고 충해방지를 통해 목재건축물의 내구성 향상과 목재면의 결함을 은폐하면서 미화함에 그 목적을 두었다. 수평부재에 가칠의 기본적 색상으로 반드시 뇌록색을 칠한 이유를 짚어 볼 때 뇌록은 오묘한 색상뿐 아니라 그 기능 면에서도 탁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라가 직접 명을 내려 채굴했던 뇌성산의 뇌록은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었을까? 뇌록은 난연(難燃), 불연(不燃)으로 화재로부터 비교적 안전하였으며 중금속이 함유되어있지 않았다. 칠이 벗겨지는 박리(剝離)나 박락(剝落)으로 인한 재도장 주기를 길게 했다. 또한 일광에 의한 변퇴색이 거의 없었으므로 풍파 다녀가는 긴 세월에도 오랫동안 편하고 자연스러운 색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말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천연안료 뇌록은 자취를 감추었고 일제시대부터 크롬산화물 등의 유해 화학안료를 사용한 페인트가 단청에 칠해지기 시작했다. 뇌록색을 내기 위해 밝은 녹색인 시아닌그린 또는 쑥색계통의 피그모솔그린 두 가지를 주색 안료로 국내산 또는 외국산 다른 안료와 함께 조색해 사용하는 것이다. 천연 뇌록 빛은 뽀얗고 은은한 옥색초록빛이었지만 화학안료로 조색한 뇌록 빛은 초록기가 센 탓에 무거운 감이 든다. 당연히 단청이 주는 깊은 멋이나 향취가 없고 기능 또한 천연 뇌록이 지니는 장점들을 화학 안료들은 절대 따라가지 못했다.

그토록 귀한 뇌록이 생산되던 뇌성산은 그저 야산으로 방치 되고 있다. 뇌록을 채취하던 뇌록지 역시 무너진 돌무더기와 우거진 풀숲에 덮여 간다. 뇌록이란 말과 쉰 개의 초배기를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간혹 산이 좋아 뇌성산성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뇌록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아득하다. 안타까운 마음에 김동욱 교수 일행이 전해 온 `장기면 뇌성산의 단청안료 유적지 조사의견서`를 토대로 금락두 선생은 1996년 3월 포항시를 통해 뇌성산 뇌록 터를 국가 지정 문화재(사적)로 지정해 줄 것을 경북도청에 요청했다. 관련된 각종 옛 문헌을 조사하고 양식에 맞게 서류를 작성하며 뇌록에 대한 과학적인 고증과 함께 당국의 보존대책이 절실하다고 써서 올렸지만 수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이 없다.

오래 전, 북으로는 호미곶면, 동해면 일부, 구룡포읍을 다 아우르고 남으로는 양남, 양북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곳이었던 장기현. 그러나 지금의 장기면은 남쪽은 감포읍 서쪽은 오천읍 북쪽은 구룡포읍에 둘러싸여 동해만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면 한 방울도 외지로 빠지는 게 없고 또 한 방울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없다는 장기면은 얼핏 오지 아닌 오지가 되어가는 듯도 하다. 그러나 역대에 걸쳐 군사적 요충지로서 북방의 계원(契圓)세력과 왜구(倭寇)에 대비한 축성(築城)을 쌓았고 의병 활동 또한 활발했던 곳, 또한 벽지로 인정되어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과 실학파(實學派)의 태두(泰斗)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유배되어 살았던 곳, 많은 서원과 향교가 품었던 학문의 향취가 후손들에게 은은하게 전달되고 있는 곳이다. 들추는 곳마다 일어서는 옛 이야기들은 문명 사회에 있어 소중한 심성 조율의 몫을 하게 될 것이다.

장기면 뇌성산이 품은 뇌록에 관한 관심 또한 화학 안료에 의존해 밝고 화려함만으로 재 치장되는 유적들의 단청을 되살릴 마지막 열쇠는 아닐까. 뇌록(綠), 인삼(人蔘), 자지(紫芝), 오송(蜈蚣지네),봉밀(蜂蜜꿀), 치달(雉獺꿩과 수달), 동철(銅鐵) 등의 칠보(七寶)가 있어 나라에 진상하였다고 전해지는 뇌성산이 깊어가는 녹음으로 또 한 계절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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