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병곡면 병곡리에서 영해면 대진리에 이르는 바닷가 길을 걷는다. 고운 모래밭의 길이가 무려 8km에 다달아 명사이십리라는 이름을 얻은 곳, 이곳은 2010년 국토해양부에서 아름다운 해안 도보여행 구간으로 선정한 `해안누리길`의 하나다. 대한민국 서해, 남해, 동해에 이르는 52개 구간 중 솔숲사이로 난 길과 모래밭에 뿌리를 내린 풀들이 내어 준 길, 그리고 고운 모랫길의 감촉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하여 `삼색의 길`이라 불리는 고래불 명사이십리길은 어떤 풍경과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영덕 영해에서 태어난 고려후기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이 유년시절에 상대산(183m)에 올라가 앞바다의 고래가 하얀 분수를 뿜으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고래뿔`이라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고래불은 수심이 얕고 물이 맑아 몇 년째 전국 최우수 해수욕장으로 선정된 곳이다. 해수욕장 오른편 둔덕 자그마한 용머리공원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오르면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휘어진 명사이십리 전체 구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출발지인 고래불해수욕장에서 영리해수욕장까지 약 3km 구간은 솔숲길을 택한다. 빽빽하게 자라 하늘을 가린 소나무 사이로 약 1m 남짓한 폭의 산책길이 고불고불하게 이어져 있다. 쌓인 솔갈비 위로 떨어진 솔방울들과 바람이 불 때마다 스치는 솔향에 몸과 마음이 청정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오른쪽으로 하얀 돌의 길이 나타난다. 갖가지 굵기의 맑은 돌이 박힌 지압로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 본다. 이내 도톨도톨한 돌길에 발이 익숙해진다. 지압로가 끝나는 곳에 자그마한 쉼터가 있다. 고래가 바다 위로 몸을 드러낸 형상과 물방울이 튀는 조각이 마치 솔숲 사이에 바다를 옮겨 놓은 듯 싱그럽다. 고래의 등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는 솔숲을 벗어나 다시 걷는다.

영리해수욕장부터는 척박한 모래밭에서 자라는 샛푸른 식물들의 향연이 끝없이 펼쳐진다. 염분기 많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뜨거운 햇살 아래 온 몸을 밀며 악착같이 바다로 가는 갯메꽃 무리와 방풍의 질긴 생명력이 눈물겹다. 풀밭길을 걸으며 문득 내가 걸어 나온 솔숲을 바라본다. 바다쪽 소나무는 해풍을 견딘 탓에 거의 눕다시피 자란다. 모래밭에 닿을 듯 말 듯 한 키 작은 해송들이 결국 숲 속에 죽죽 뻗은 나무를 키우는 것이리라. 이 길은 오래전 해안 초소가 있었던 탓에 초병들이 낸 길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보이는 참호의 흔적은 새삼 분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너진 참호엔 모래만이 가득한데 제법 고급스런 의자 두 개가 하얗게 바랜 채 놓여있다. 대부분 타이어를 걸쳐 놓은 것에 비하면 그 자태가 매우 이색적이다. 아마도 꾀가 많은 초병이 어디선가 끙끙 날라다 놓은 모양이다. 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밤새 나누던 긴 이야기는 어디로 갔을까? 군데군데 끊어진 철조망이 발갛게 녹이 슬어 뒹군다.

조그만 경고 팻말 앞에서 풀밭길과는 작별이다. 그곳은 해안 식물에 관한 연구를 하기 위한 환경부 조사구역이기 때문이다. 바다 가까이로 나가 모래길을 걷는다. 조개껍질 하나 없는 깨끗한 모래밭에는 새들의 발자국이 단풍잎 모양으로 수없이 찍혀 있다. 작고 가냘픈 발자국을 지우고 돌아가는 얇은 파도 위로 내 그림자가 선명하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아직 걸어가야 할 아득한 길이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악착스레 걸어 온 길이 보인다. 그 가운데 온점처럼 서 있는 내가 보인다. 삶의 어느 자리가 이토록 선명하게 생을 생각하게 하였던가.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온다. 몇 마리에서 몇 십 마리로 순식간에 불어난 새떼가 시끄럽게 지저귄다. 영리해수욕장을 지나 덕천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1.9km 구간은 새들의 세상이다. 조개껍데기와 자갈이 깔린 오목한 곳마다 점박이 알들이 지천이다. 두 개 혹은 세 개씩 낳아 놓고 근처를 떠나지 않았던 새들에게 이방인의 등장은 비상사태일 터, 알들을 보호하려는 모습이 감동스럽다. 지붕도 없는 저 둥지에 어찌 햇볕만이 내리 쬐었겠는가. 분명 비도 다녀갔으리라. 그런 날 어미는 알을 품고 앉아 하염없이 제 날개를 적셨을 생각에 뭉클하다. 걸음을 재촉하자 새들은 조금 더 선회하다 긴장을 풀고 이내 흩어진다.

덕천해수욕장에서 솔밭길은 다시 시작된다. 고래불에서 만난 길과 비슷하지만 긴 모래밭을 걸은 후라 그런지 느낌이 다르다. 바다 쪽으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음수대가 있고 솔숲에는 고즈넉한 산책로가 있다. 금방이라도 물을 튕기며 헤엄쳐 오를 것 같은 고래 모형 앞, 쉼터를 만들기 위해 베어낸 소나무의 밑동이 그대로 의자가 되어 있다. 걸터앉아 땀을 식히며 자리를 내어 준 나무의 한 생에 대해 생각한다. 이곳에는 쉼터 뿐 아니라 운동기구, 전화놀이 벤치, 풀장 등 계층을 막론하고 즐길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좀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싶어진다. 머리카락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다. 그 소리에 숲이 술렁인다. 나뭇가지들이 두리번거린다. 새와 풀과 길의 귀도 쫑긋 선다.

덕천해수욕장에서 대진해수욕장에 이르는 길은 약 송천을 만나 잠시 끊어진다. 송천은 서읍령, 독경산 등에서 발원하여 심산계곡을 지나 약 40여 km를 흐르다 대진해수욕장에 이르는 맑은 하천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잔잔한 물결이 피는 송천은 마치 호수 같다. 폭이 그리 넓지는 않으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으니 잠시 도로를 이용해 송천교를 지나 도착지인 대진해수욕장으로 간다. 바라보는 어느 곳이든 푸른 바다가 푸른 하늘의 팔을 베고 있다. 파도를 벗 삼아 느리게 행복하게 걸어 온 명사이십리길, 삶의 조급한 짐들을 다 내려놓은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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