⒁수운 최제우와 용담정
⒁수운 최제우와 용담정
  • 박경환(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등록일 2011.04.28 19:39
  • 게재일 201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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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국운의 쇠잔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서서히 어둠과 고통의 터널로 빠져들고 있었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어 감에 따라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가 붕괴되고, 잦은 `서양 오랑캐`(洋夷)의 위협에 두려움은 높아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척의 세도정치와 지배계층의 권력 다툼은 정점으로 치달았고, 삼정의 문란과 이를 틈탄 벼슬아치들의 탐학, 잇단 기근과 질병의 창궐은 백성들을 깊은 도탄의 수렁으로 빠뜨렸다. 1811년 홍경래의 난 이래 끊이지 않던 민중봉기가 1862년에 이르러 진주민란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과 고통에 따른 몸부림이었다.

시대 도처에 넘쳐나는 고통과 모순은 경주 현곡 출생의 민감한 영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를 불러냈다. 6대조 이래 벼슬을 내지 못한 채 기울어져 가던 경주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었지만 학문에 몰두하지 못해 여의치 못했고, 변변한 경제적 기반도 없었다. 기울어져 가던 가세는 당시 나라의 형편을 닮아있었고, 그의 불우함과 고뇌는 당대 백성들의 고통과 둘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호구지책으로 나선 떠돌이 장사꾼 생활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수많은 민초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고통에 눈뜨게 했다. 이로써 그는 개인적 차원의 아픔을 넘어서 시대를 앓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얻은 결론은 혼란한 사회와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사람들의 마음을 구하는 길은 하늘의 뜻[天命]`을 깨닫고 따르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천명을 찾아가는 구도의 걸음은 1856년 울산 처가살이 시절부터 1859년 10월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고향 구미산 용담정에서의 수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찾아 받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은 결국 1860년 4월 5일의 절대적인 종교체험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늘에 정성을 드리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하늘의 소리를 듣는 신비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체험은 세상을 구할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으로 이어졌고, 이후 1년에 걸쳐 그것은 말과 행동으로 모습을 이루게 된다. 동학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동학의 포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오고 동학이 점차 세력을 형성해 가자 정부와 지방의 유림 등 보수 기득권 세력들의 견제와 탄압이 찾아왔다. 그들이 보기에 동학은 본질상 서학과 동일하며 유학의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이단이었던 것이다. 이에 최제우는 1861년 호남지역으로 피신했다 다음해 다시 경주로 돌아왔는데, 이 시기 동안`논학문(學文)`·`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어 동학의 교리를 체계화한다. 이후 최제우는 1860년의 깨달음 이래 채 4년이 안 되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대구감영에서 `사특한 가르침으로 올바른 도리를 해쳤다`(邪道正)는 죄목으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진다.

`동학`은 동쪽의 진리라는 의미이다. 동학이라고 이름한 것은 서양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적 토대인 서학에 맞서는 동쪽, 곧 이 땅의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깨달은 진리를 담은 4편의 한문체 논설과 9편의 한글가사는 사후 해월 최시형에 의해 동학의 기본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로 편찬되어 세상에 나왔다.

동학 경전은 수운 최제우라는 한 영혼이 시대의 어둠과 고통을 깨치려는 간절한 염원으로 품어낸 사유의 산물이다. 그것은 모순의 현실에 대한 극복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적이다. 그런데, 현실을 넘어서는 변혁의 가르침이라 해도 현재의 말과 생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최제우의 동학은 고립적이거나 평지돌출의 사상이 아니라 그가 접했던 다양한 사상들의 창조적 절충이고 변용(正)의 산물이다. 즉, 그는 유·불·선과 기타 민간신앙 등 전통사상의 계승과 창조를 통해 변혁의 길을 찾았던 것이다.

전통사상 중에서도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유학, 곧 주자학이다. 그런데 당시 주자학은 비록 영향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에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배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제우 자신 역시 양반 집안에 나고 자랐기 때문에 주자학적인 사유형식에 훈습되어 있었다. 따라서 동학의 가르침은 많은 부분에서 주자학적 사유에 뿌리를 둔 논리 형식이나 개념과 명제를 매개로 해 전달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동학이 전통사상인 유학의 지향이나 사유방식을 적지 않게 공유하고 있다면, 동학의 이론적 창조성과 실천적 혁신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유학자들과 달리 동학 창도자 최제우가 당시 민중들의 고통과 시대의 어둠에 대해 관조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아픔으로 삼아 대면하고 타개하려 했기 때문이다.

시대의 고통과 어둠은 더 이상 `누천년에 운이 다한` 유학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실은 한가한 이론적 분석이 아니라 시대의 고통과 어둠에 맞서고 행동하는 결단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동학은 유학에 의거하되 유학을 넘어서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서`에 대적하는 `동`의 진리, 옛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 모순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변혁의 의지를 담고 있다.

우리 사상사를 돌아볼 때 동학은 이 땅에서 거둔 창조적인 사상의 목록에 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성취 중의 하나이다. 동학에서 우리는 유학이 기획하고 지향했지만 현실적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상의 궁극적 실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동학은 유학이 봉건사회의 현실적 한계로 인해 이론적 천명이나 불완전한 구현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인간존중과 만인평등 사상을 실현해 낸 것이다. 그것은 최제우라는 시대적 아픔에 동참한 인물의 강렬한 열망과 사상적 반추를 통해 유학을 넘어서는 사상적 개벽과 시대의 어둠을 깨치는 실천적 개벽을 이루어내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동학을 주목하는 것은 그 속에서 자유, 평등, 인권 등 근대적 이념의 자생적 원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학은 부자유스럽고 차별과 부조리한 억압이 넘쳐나는 현실에 맞서 사람은 하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의 인간관을 천명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절대적 자유의 존재이고 평등하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동학은 중세의 어둠을 깨치고 왕조의 끝자락에 팽배한 불안을 넘어서서 근대를 향한 빛과 희망을 주었으며 시대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박경환(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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