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 작가·`아시아`발행인
한국 급진좌파 운동권이 반핵의 깃발을 높이 게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그때는 평양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한 줄짜리 오보도 등장하지 않은 반면에 미국의 핵무기가 남한에 배치돼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시절이었으니, 그들의 반핵은 당연히 반미의 한 축을 이루었다.

경북 동해안 지역에 반핵의 깃발과 아우성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9년 바로 이맘때였다. 물론 그것은 급진좌파의 반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영덕군에서 핵폐기물 처리장설치 반대운동이 드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요새는 한결 부드럽게 방사성폐기물이지만 그때는 살벌하게 핵폐기물이라 불렸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포항 청하면에서 두세 차례 똑같은 반대운동이 뜨겁게 펼쳐졌다.

그 운동을 나는 적극 지지했다. 내가 애정을 쏟은 (사)포항지역사회연구소의 지역연구 종합저널 `포항연구`에다 심층취재와 반핵논문으로 특집을 꾸리기도 했다. `결사반대! 핵추방! 출렁이는 영덕·영일`, 이것이 1989년 가을에 나온 `포항연구` 제2호의 심층취재 제목이었다. 1979년 3월28일 발생한 미국 스리마일 사고와 1986년 4월26일 발생한 소련 체르노빌 사고의 참상도 알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이 핵무기 반대를 위한 둘밖에 없는 증거라면, 스리마일과 체르노빌은 원자력발전소 반대를 위한 둘밖에 없는 증거였던 것이다.

그때 나의 반핵은 말 그대로 반핵이었다. 인류 파멸을 초래할 수 있는 세계의 모든 핵무기에 반대하고 어느 순간에 대재앙으로 돌변할 수 있는 세계의 모든 원자력(핵)발전소에 반대했다. 선이냐 악이냐, 정의냐 불의냐. 이 간편한 이분법으로 나눌 경우에는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반핵은 선이요 정의며 찬핵은 악이요 불의다. 인간의 과학기술이 그 핵의 폭발 본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몇 년 전 어느 날, 이른바 지천명(知天命)이라는 인생의 어느 지점으로 다가서고 있었을 때, 오랜 반핵의 신념에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원전을 인간에게 `필요악의 존재`로 받아들였다. 대안 없는 반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혐오하는 내가 그렇게 후퇴를 택한 까닭은 무엇보다도 태양력, 풍력, 조력 등 화석과 핵을 대체할 청정에너지가 도시와 공장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적 한계를 직시한 것이었다. 화석 에너지의 고갈시점이 예측되고 있어도 대안 에너지들은 오래된 이론과 달리 여태껏 상용화 가능성을 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틈을 놓치지 않고 원전 예찬세력이 `원전은 청정에너지`라는 선전을 진리의 말씀처럼 퍼뜨렸다. 그것은 대중을 향한 심리전이었고, 드디어 대중은 `원전은 필요악`이라는 인식마저 놓아버렸다.

영덕, 울진, 삼척 등 한국 동해안 지역민이 원전 유치운동에 나선 가운데 느닷없이 터져 나온 후쿠시마 대재앙이 인류에게 원전 반대를 위한 세 번째 증거를 들이댄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정부가 해야 할 시급한 조치가 있고 덜 급한 조치가 있을 것이다.

일본열도 서쪽에서 발생하는 지진 영향권에 휘말릴 수 있는 고리, 월성, 울진 원전과 울산공단, 포항공단에 최악 쓰나미 시나리오를 적용하여 이제라도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가장 시급한 조치다. 그러나 그것은 긴급사태를 가정한 대비 매뉴얼의 점검과 보완에 지나지 않는다. 불안한 민심을 안정시켜서 민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대재앙을 감당하고 있는 일본이 잘 보여주듯이 어떤 경우든 국가대사를 좌우하는 첫째 조건은 정부와 국민의 신뢰 수준이다. 대안 에너지들이 상용화되는 그날까지 원전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에너지 생산 조건에서 정부는 우리 국민, 특히 동해안 지역민을 정직하게 설득해야 한다. 신뢰는 정직이 생명이다. 모든 신뢰는 정직하지 않으면 산산이 깨지기 마련이다.

지역민에게 돌려주는 `위험수당`인 지원금의 크기를 앞세워, 다시 말해 돈으로 민심을 사려고 덤벼서는 안 된다. 한국 원전과 일본 원전은 어떤 점에서 위험성에 노출되는 수준이 다른가. 이에 대한 정직한 설명은 신뢰 형성에서 기본의 하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 단계 인류의 과학기술로서는 `원전이 필요악`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허심탄회한 공감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 바탕 위에 상대적 안전성과 긴급사태 대비능력과 위험수당 등을 올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신뢰를 쌓고 민심을 얻는 하나뿐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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