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 작가·`아시아`발행인
지난 금요일 오후 3시40분쯤, 어느 은행 객장에서 일본 지진 속보를 지켜보았다. 인간의 온갖 재능과 기술을 집대성한 도시가 처참히 파괴되는 광경이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비규환 속으로 휘말린 사람들의 아우성이 벌떼 소리처럼 귓전을 맴도는 가운데 장엄한 자연 앞에서 결코 인간의 과학기술이 오만을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우쳐야 했다.

은행을 나와 거리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 셋과 만났다.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속보를 알렸다. 하나가 얼른 대수롭잖게 반응했다. “조상들이 지은 죄가 많아서 벌을 받는 거지” 또 하나가 맞장구쳤다. “영화에 나온 대로 침몰할 모양이네” 다른 하나가 되물었다. “진앙지가 도쿄 북쪽이라고 했지?” 그는 맞다는 답을 듣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아들이 오사카에 유학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과 헤어진 뒤 마음이 더 뒤숭숭하고 우울해졌다. 동해 건너편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형언하기 어려운 재앙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향한 인간적인 연민과 아픔보다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거부증을 먼저 드러내는 한국의 저 오십대 사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어린 시절부터 습득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시나브로 일본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거부증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거부증이라는 껍질 속에는 마치 달걀의 노른자와 흰자 같은 인간적인 연민과 아픔도 살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국적을 떠나서 인간의 기본자격을 상실한 존재다.

그런데 왜 아직도 `많은 우리`는 일본인들이 겪는 재앙을 보면서 인간적인 연민과 아픔보다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거부증부터 먼저 드러내야 한단 말인가? 그들 셋 중의 하나가 자식을 외국에 유학 보냈을 정도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우리의 발목을 과거의 쇠사슬에 묶어놓겠다는 것인가? 대체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스스로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멀리는 임진왜란, 가까이는 식민지가 한국인에게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거부증을 거의 후천적 본능으로 형성시켰지만, 여기에는 잘못된 국사교육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자기의 실상부터 먼저 강조하지 않은 국사교육, 민족의 불행과 비극에 대하여 먼저 `남의 탓`부터 가르친 국사교육을 이제라도 맹렬히 자성(自省)해야 한다. 가령 임진왜란과 식민지를 다룰 때는 당대 세계정세 속에서 조선이라는 국가가 어디로 나아가야 했는가에 대한 토론이 국사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장수 이름과 연대나 달달 외서 퀴즈대회에나 출전하려는가? 먼저 일본을 탓해서야 어찌 자강(自强)의 진리에 닿을 수 있겠는가?

임진왜란을 생생히 증언하는 유성룡(1542~1607)의 저 비참한`징비록`을 펼친다면, 유성룡이 이순신을 발탁하고 구원한 전후맥락을 세세히 짚어가며 두 인물의 만남을 `위대한 만남`이라 명명한 송복(1937-현재)의 역저 `위대한 만남`을 읽는다면,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이라는 국가에는 썩어빠진 정치권력과 굶주리는 백성밖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는 그 실체적 전모를 알게 된다면, 감히 우리가 역사의 양심을 걸고 조선의 정치권력보다 먼저 일본의 정치권력을 탓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자기방어 능력도 없이 백성만 도탄에 빠트렸던 조선의 정치권력을 먼저 매섭게 비판해야 백번 옳은 일이다.

식민지에 대한 국사교육도 마찬가지다. 을사오적이 식민지로 만들었는가? 그들이 없었어도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세계사 속에서 조선이 얼마나 황당한 국가였는가를 공부한 다음, 그 정보를 바탕삼아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에 먹히는 과정을 추적해야 한다. 을사오적을 용납할 수 없지만, 그들과 일본의 협잡 탓에 식민지로 전락한 듯이 착각시키는 국사교육은 `내 탓`의 책임의식을 흐리게 한다. 조상의 불행과 비극을 `남 탓`으로 돌리게 한다. 그것은 민족의 체면을 살리는 게 아니다. 면죄부를 만들어 역사의 교훈을 가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엄청난 과오다.

약자에게는 `남 탓`을 앞세우는 타성이 있다. 이것은 인간적인 연민과 아픔이라는 자기의 존귀한 인간성마저 스스로 갉아먹는다. 이제 한국인은 그 오랜 슬픈 타성을 넘어 당당해야 한다. 그래서 올바른 국사교육은 더욱 절실한 시대적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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