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에서는 돼지와 소들이 매몰되는 장면이 보도되고 있다. 석회와 비닐을 깔고 땅을 파고 구제역에 감염됐거나 그렇다고 의심되는 소와 돼지들이 집단으로 매몰되고 있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괴로운 장면이다. 보도 화면을 통해 보는 느낌이 이러할진대 현장에서 그 작업을 진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 것이다. 말 몇 마디로 위로될 사안이 아닐 것이다. 누구든 해야 하고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어쩔수 없는 일이기에 고통스럽지만 진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기에 살 처분이라는 그 단어조차 살벌한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살처분된 가축수가 300만 마리가 넘어섰다고 한다. 끔직한 숫자다 죽음의 단위가 100만, 200만, 300만 단위로 집계되다니, 이것은 재앙의 수준이다. 그것도 참으로 억울하고 가슴 칠 죽음들이며 축산농가의 가슴은 그 수 만큼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대책은 국회와 정부에서 논의 될 것이고 그것의 결정에 따라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외적 비용만을 언급하지만 어느 쪽에서는 살처분된 동물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품을 위로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한 마리, 한 마리의 소와 돼지가 계산되는 것이 고깃값으로 만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체로서 인간을 위해, 인간의 삶을 위해 나름의 역할을 한 존재로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불교적 시각과 종교인의 관점을 떠나서라도 어떤 방식이든 이 엄청난 죽음과 그 죽음에 원치 않는 과정을 지켜보고 참여한 이들에게 위무와 안정의 의식은 필요하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얼만 큼의 책임을 지고 있다. 이 엄청난 재앙에서 조금씩은 아주 조금씩은 이러한 가책과 부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의 마음과 300만마리의 생명과 지금도 현장에서 고통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이들을 위한 마음모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종파와 교리를 내세우지 말고 이러한 재난에 직면한 종교인들의 생각을 모았으면 한다. 내적인 고통을 겪는 이들과 수백만의 생명을 위해 종교인들이 할 역할이 분명이 있을 것이다. 인연은 하나를 낳고 또 하나를 낳아 결국 나뉠 수 없음을 자연은 보여준다. 우리삶이 그러하고 세상의 생명의 이어짐이 그러하다. 그 가운데 사람만이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자. 결국 우리의 틀 속에서 삶은 이어지고 영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