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

생활이 고달프고 기쁨마저 증발해 버리면, 사람들은 뜨거운 사막의 태양 아래서 터벅터벅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는다. 인간은 찡그리면서 투덜대지만, 가축인 낙타는 자기의 할 일인 양 사막을 무표정하게 앞으로만 나간다. 순수하다.

사람들은 IQ가 좋아서 동일한 세상사에도 표현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 똑같은 사실도 슬픔에서 기쁨까지 여러가지로 나타낸다. 이 말은 맞는 표현도 있지만 그만큼 거짓도 많다는 것도 된다. 좋아하는 척 하면서 사기를 놓고, 남을 도우는 척 하면서 자기의 이득을 도모한다. 이런 면에서는 지식이 있는 인간은 짐승들에게서 `순수`를 배워야 한다.

그들은 표정이 단순하고, 거짓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것은 짐승이 IQ가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인간은 왜 좋은 두뇌를 선(善)을 위해 쓰지 않고, 사악한 곳에만 집중 하는가? 대답은 `꾀가 많다`는 것이다. 선행은 차라리 낮은 두뇌수준이 좋지 않을까?

사람들은 짐승을 잡아서 요리해 먹는다.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고, 포만감을 느끼려고 먹는다. 식용이 되기 위해 소는 도살장으로 울면서 끌려가고, 사람들은 그 살코기를 먹으면서 친목도 나누고, 이를 후비면서 여유롭게 껄껄 웃는다. 어떤 미식가는 맛을 좀 더 내기위해 양념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고기를 먹고 난 후, 앙상한 뼈만을 짐승에게 준다. 입안의 찔림으로 얼마나 아플까!

얼마 전에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 근처에서 어미고양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래서 태어난지 1개월 된 새끼 고양이 2마리를 내가 키우던 중에 한달 쯤 지나자, 이 어린 고양이마저 잃어 버렸다. 아마도 다른 짐승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어미가 죽으니 새끼마저 불행하게 되는 것은 사람과도 같았다.

`TV 동물농장`에는 개 등 짐승들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제일 안타까운 것은 개가 유기되는 것과 유기된 개가 멀뚱히 주인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초점 흐린 눈매는 나의 마음에 애처러움을 안겨 주었다. 개는 특히 손해를 많이 본다. 개보다 못한, 개 같은, 개보다는 낫다 등 여러 면으로 악역의 주인이 된다. 어느 정도 표정이 가능한 짐승의 얼굴 표정은 모두 우리에게 측은심을 갖게 만든다. 짐승도 사랑을 알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성경에도 동물들에 대한 구절은 아주 적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네가 만일 나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 지니라`(출애급 23;4).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채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 지니라`(신명기 22;4). 등 몇 곳에 불과하다. 요즈음에 성경을 기술한다면 아마도 환경문제와 짐승(생물)보호, 그리고 전도에서 컴퓨터 이용법 등이 기재될 것이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생명의 동등권과 연결성을 감동성 있게 주창한다. 인간은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다. 필요할 때 적당량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마, 냉장고에 가득 넣어 두고 배불리 먹고 난 후, `꾸륵` 만족의 트림을 한다. 과도한 살생에 대한 고발과 용서는 종교가 해야한다. 종교는 인간사랑 뿐만 아니라 동물사랑에까지 행위가 미쳐야 한다.

종교는 선의 실천을 위한 분야는 애써 외면한 채, 정치 등 사회 분위기에만 민감해서는 안된다. 버림받은 개의 슬픈 눈에까지 생각이 미칠 때, 선은 확장을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