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명 시인
조선 말 흑백 사진이다. 이마 위에는 보따리를 이고 양손에는 어린아이들의 조막손을 잡고 치맛자락으로 계집아이들을 뒤에 숨긴 여인. 그 여인 앞에는 휘적휘적 앞서서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앞서 가는 남자가 있다. 남존여비 사상의 오랜 풍습이 만들어낸 풍경 이지만 이 풍물 사진에서 나는 여인의 약함보다 강인함을 읽는다. 이 사진에서 나는 남녀평등의 문제보다 오히려 모든 것을 섬기는 여성성의 승리를 읽는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강인함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이 흑백사진 한 장에서 나는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약하면서도 끈질긴 우리나라 여성의 참 모습을 본다.

추운 겨울에도 새벽 일찍 일어나 물을 길어다 밥 짓고 찬 물에 빨래하고 또 산에 올라 나무를 해오고 아이들 돌보고 길쌈 하고 바느질 하고 집안 일은 쉴 새 없는데 밭일 들일마저 해야하니 힘들고도 힘들었다. 조선말의 여성들은 시집살이에 지치고 남편 사랑해주지 않아 서럽고, 배운 것 없어 무식하니 나중에 자식마저 무시하기 일쑤였다. 죽어도 한이 남아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네들이 주로 불러 한을 달래던 정선아리랑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여성들의 한을 새겨 볼 수 있다.

`우리 댁에 서방님은 잘 났던지 못 났던지 얽어매고 찍어 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노가지 나무 지게 위에 엽전 석 냥 걸머지고/ 강릉, 삼척에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구비 부디 잘 다녀 오세요/…/칼로 물치듯이 뚝 떠나가더니 평창 팔십리 다못가고서 왜 돌아왔나/ 아들딸 낳지 못해서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 암자 마디봉봉 마루 끝에 찾아가서 칠성당을 모아놓고/ 주야삼경에 새움의 정성에 치성 불공을 말고/ 타관객지에 떠다니는 손님을 푸대접 말게/…/임이 오나 누웠으니 잠이 오나 등불을 도도 놓고 침자를 도도 베고/얼마나 기다렸는지 잠시잠깐 깜빡 조니 새벽달이 지새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이런 여성들의 한이 결국 연약하지만 강한 면을 기르게 했을 것이다. 정선아리랑에서도 읽듯이 노래하는 여인은 이미 자신을 낮추어 분수를 알고 한을 풀기위해 무진 노력한다. 또한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아리랑고개를 넘듯 삶의 고비를 넘어가는 끈질긴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성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들만이 가진 세계 `자궁` 때문이다. `자궁`에서는 항상 새로운 우주가 궁글고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고 있다. 어느 날 나는 텔레비전에 나온 5남매의 육아일기를 쓴 박정희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중에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말이 있었다. “남자들은 자궁이 없거든, 아이를 낳아 보지 못하니 이런 육아일기를 쓰긴 어려울거야” 이 말은 남자인 내게 서늘한 한마디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시대는 여성의 시대`라고 한다. 나는 미래학자의 이야기나 지식인들의 이러한 지적을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의 시대는 그저 오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의 가치는 노자의 도덕경에도 쓰여있듯 모든 만물이 태어나는 근원이다. 또한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를 치유하고 아물게 해주는 지혜의 길이다. 그러므로 남성성에 의해 파괴된 정신과 자연이 이제 여성성이라는 새로운 몸을 얻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라고 한 성경의 한 구절처럼 남성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에 감싸 안아 지게 되는 그런 순간 새로운 세상이 문을 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래된 흑백사진을 다시 오래 들여 다 본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는 것만 같다. 그 눈물은 쓰러져 가는 세상을 보듬고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가치를 가진 눈물이다. 그녀가 이고 가는 허수룩한 보따리 속에는 한 땀 한 땀 눈비비며 바느질한 끈질기며 단단한 옷자락들이 들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이 세상을 다시 기워 치유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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