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 출신의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은 관官)·학(學)·언(言)·정(政) 4박자를 두루 갖춘 경제전문가다. 경산시 신천동에서 3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난 최 장관은 경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대구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8년 대학 재학 중 행정고시 22회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한 뒤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청와대 경제수석실, 기획예산처에서 근무한 정통경제관료 출신이기도 한 최 장관은 이후 한국경제신문사 부국장을 거쳐 지난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상근경제특보로 일하면서 정계와 인연을 맺었다. 17·18대 총선에서 경산·청도지역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지난해부터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입각해 일하고 있다. 최 장관을 만나 어린 시절 얘기부터 공무원, 언론계, 정계로 삶의 역정을 바꾸며 살아온 얘기들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어릴 때 꿈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어린 시절 맥아더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군인이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3형제 중 바로 위의 형이 육사로 진학했기 때문에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죠. 김태영 장관과 동기생이었던 형은 훈련 도중 불의의 사고로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부친은 경산에서 중농이상 규모로 농사를 지었는데, 3형제 가운데 막내인 저에게 고향을 지켜달라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당부를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소꼴을 베고, 모내기를 하러 나갔습니다. 중학교도 대구에 있는 경북중학교로 진학하려 했으나, 부친이 경산에서 학교 다니며 농사일을 배우라고 해 경산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때도 부친은 “대구까지 학교 갈 게 뭐 있나”고 만류했으나, 그때는 `공부를 해야 농사일을 면하겠다`고 생각해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후일 제가 공직과 언론계를 거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고 보니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다닌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거나 가축을 키우고, 식당과 주유소 등을 운영하면서 모두 동네 유지가 돼 있었습니다. 고향 친구들이 저를 많이 도와줬고, 큰 도움이 됐죠. 그때서야 부친이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웃음)

-경제관료로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1983년으로 기억되는 데,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에서 사무관으로 재직 시 아파트 투기자금을 회수하는 법령인 `아파트 채권 입찰제`를 만들었던 일입니다. 이 제도 덕분에 지금까지도 서민들의 내 집 마련 자금 대출재원이 충당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아파트 청약에서 7번 떨어지면 영순위가 될 때였는데, 500만원 청약통장 프리미엄이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한 채 값인 6천만원이나 했습니다. 이러니 신문에서도 난리였죠. 부총리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불려가서 “당장 (이런 불합리를) 없애라.”는 불호령을 듣고 왔습니다. 당시 아파트 분양가를 평당 135만원으로 규제하고 있었는데, 저는 시세가 평당 450만원 가량 하는 아파트 가격을 억지로 규제하니까 프리미엄이 붙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분양가의 차액을 장기저리로 회수해 집값이 올라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위한 재원으로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이 제도 도입으로 수십조원의 시세차액이 회수됐고, 무주택서민에게 주택구입자금의 50%까지 대출해주는 재원이 대부분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 뒤 이 일을 아는 선배 공무원들과 동료들은 저에게 “정부에서 평생 월급을 받을 만큼 일했다”는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기획예산처에 몸담고 있을 때는 500억원 이상이 소요되는 사업에 대해서는 반드시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도록 해 국가 예산의 낭비를 막았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공무원 재직 중 연수생 신분으로 유학 가서 박사학위까지 딴 것으로 아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당시에는 박사학위를 하려고 해도 휴직제도 자체가 없었습니다. 석사를 하고 난 뒤 박사학위를 하려면 해외 유학기간의 1.5배를 근무해야 다시 나갈 수 있었죠. 당시 경제기획원 대외경제조정실장인 김인호씨가 총무처에다 공직자 중에서도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설득해 제도를 바꿨습니다. 그때 이후 성적이 좋은 사람은 휴직이 가능하게 됐죠. 저도 그 덕분에 1991년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국제경제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공무원 연수생 신분으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까지 밟는 것은 꽤 이례적인 경우였는 데, 관료 사회에서 2년을 더 휴직한다는 것은 연공서열의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그렇지만 그 선택이 제 삶을 오히려 더 역동적으로 만든 배경이 된 것 같습니다.

-20여 년 공직생활 후 갑자기 언론사에 투신하게 됐는 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근무를 했는데,환란이 닥쳤습니다. 1년 남짓 죽을 고생을 하며 근무를 했는데, 경제부처 사람들이 사법적인 소추의 대상이 됐죠. 10년을 끌어 결국 무죄판결을 받긴 했지만…. 또 정부가 교체되고, 시장경제정책에 맞지도 않는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정부정책을 비판할 수 없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길을 개척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결국 1999년 한국경제신문사로 옮겨 논설위원, 경제연구소장, 편집부국장을 지냈습니다. 주변에서는 “잘나가는 놈이 왜 그만두냐”고 했고, 시골에서는 “서울 가서 한자리하는 줄 알았더니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신문사에 간다니 무슨소리냐”고 극력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언론사로 자리를 옮기고서는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전에는 정책을 만드는 공급자 입장에 있었다면 수요자 입장에 와보니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기자들이 안 써주거나 작게 쓰면 서운했는데, 시각을 바꾸고 보니 내가 기자라 해도 기사가 안 되는 정책들이 많더군요. 그때가 특정 사안을 균형 있게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치와는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었습니까.

▲지난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상근경제특보를 맡으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총선에 경산·청도 지역으로 출마해서 여의도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죠. 그때 저의 출사표가 `경제를 바꾸러 정치에 나선다`였습니다. 제 신념이기도 합니다.

-공무원에서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으로 변신을 했는데, 적응이 어렵지 않았나요.

▲매번 벤처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웃음) 그렇지만 공직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언론사생활에 도움이 됐고, 언론경험이 정치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물론 환경이 달라져 적응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치도 전문성이 있어야 하고, 앞으로는 전문가 정치시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저로서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정치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 의원으로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일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국민들이`왜 정권을 교체해야 되는가`하고 물을 때 “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했고, 그런 약속으로 정권을 잡은 것입니다. 그 토대는 한나라당의 정책과 노력이 쌓여서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한나라당을 찍어주면 경제는 더 잘하겠구나”는 확신을 심어줬기 때문이죠. 저도 거기에 일조하지 않았나 자부합니다.

최 장관은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정책위 제4정책조정위원장을 비롯해 수도이전문제 특별위원회 간사, 농어촌 살리기 특별위원회 위원, 공공부문 특별위원회 위원, 조세개혁특별위원회 위원 등 경제전문가로서 폭넓은 분야에 걸쳐 정책을 수립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친박계 핵심의원인 최경환 장관은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종합상황실장을 맡았다. 경선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선이 끝난 뒤 이명박 후보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대선 본선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총괄간사를 맡았고, 대선 직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 2분과 간사위원으로 정권인수 업무를 도왔다. 그만큼 그가 경제정책에 관한 한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 당의 수석정책조정위원장 겸 제3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아 정부와 당의 모든 정책을 총괄 조정해 왔다.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중과 등 부동산관련 제도를 개선해 부동산거래를 활성화시켰고,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소득세·법인세 인하를 추진했다. 2008년 리먼사태로부터 시작됐던 금융위기 타개책으로 130조원의 은행지급보증과 36조원이 투입되는 감세 및 재정정책을 최일선에서 지휘했고, 규제완화와 일자리창출 등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정책을 총괄적으로 조율했다. 특히 2009년 재정대책으로 추가경정예산이 수립될 당시, 여당의 예결소위위원으로 긴급 투입되어 사상최대규모의 추경예산을 이끌어내어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대구·경북 경제침체에 대한 원인과 대책을 제시한다면.

▲대구·경북지역의 경제적인 위상이 계속 추락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글로벌 적응에 실패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섬유 건설을 위주로 한 성장 뒤에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에 실패했다는 점입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려면 세계경제와 바로 연결시켜야 하는 데, 그 통로는 국제공항과 항만입니다. 대구·경북은 간접 연결되고 있는 데 반해 부산이나 인천, 수도권은 직접 연결되는 지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기업이 여기에다 공장을 짓고 투자하겠습니까? 이게 10년 야당의 후유증입니다. 또 대구·경북지역 신성장동력으로는 광역경제권 선도산업으로 선정된 그린에너지(태양광 부품소재, 수소연료전지)와 IT융복합(실용로봇, 의료기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분야는 잘 선정됐다고 봅니다. 로봇진흥원도 IT융합산업이기 때문에 대구에 배치를 했습니다. 이제 집이 지어지고, 얼개도 갖춰지고 있습니다. 이제 채워넣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생각입니다.

-대구·경북 지역민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면.

▲장관으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지역민들과 자주 못 만나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회의원으로서, 장관으로서 실물경제회복에 매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지역구민에게 혜택이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많은 이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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