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한꺼번에 등재되었다고 우리가 즐거워할 사이 중국은 고구려의 수도와 무덤까지 포함시켜 무려 38건이나 올렸다.

더욱이 중국 문화재 당국은 1985년 이후 중단했던 원산원 여산 야산에 있는 진시황(秦始皇:BC 259~210)병마용 발굴 작업을 지난달부터 재개했다.

중국 문화재 당국이 이번 발굴에서 노리는 문화재들은 병마용보다 역사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빼어난 가치를 인정받을 유물을 출토시킬 마음을 내심 품고 있는 것 같다.

1985년에 출토된 병마용과는 달리 시황이나 장군용이 발굴된다면 기원전 고도로 발전된 중국의 역사 문명을 알리고 출토 유물의 고고학적 가치를 통해 세계를 흥분시킬 금세기 최고의 발굴이 될 수 있다.

이미 첫 발굴 당시에 보지 못했던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와 채색을 한 병마용 들이 출토됐다면서 중국 언론들이 기사를 톱으로 키우는 등 흥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기원전(2200년) 시안에서 이미 채색을 한 용기를 인간이 사용했음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다.

더욱이 병마용에 입혀진 채색 안료가 자연계에선 한 번도 발견된 사실이 없는 화학 합성물질이어서 중국 고대문화의 깊이를 상상할 수 없게 한다.

병마용은 지난 1974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30km쯤 떨어진 여산(驪山) 산자락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1m쯤 아래 잘 다져진 적토 층을 뚫고 내려갔으나 물은 나오지 않고 팔다리를 닮은 도기(陶器) 조각들이 나왔다고 한다.

이 농부는 사람 꼴이 갖춰진 도기를 새 쫓는 허수아비로 썼을 정도여서 숱한 병마용들이 국내외로 밀반출됐으며 허술한 발굴 작업이긴 했었지만 8천여 병사와 말의 모습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20세기 세계 최고의 발굴이 돼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쫓았던 진시황의 사후세계가 조금씩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경주에서 보는 신라고분과는 달리 야산 전체를 봉분으로 하고 있으니 여기저기에 매장돼 있을 문화재 규모는 워낙 방대해서 짐작할 수 없다.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 편을 보면 신화시대를 벗어나 실제 역사시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진시황(秦始皇)은 13살 진왕(秦王)에 오를 때부터 능묘 건설 공사에 들어가 6국을 통일 하기까지 37년간 공사를 벌였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49살에 죽었다.

능묘 건설 당시 가장 많이 인부가 동원됐을 때는 70만이 넘었다고 한다.

현재 밝혀진 무덤의 길이는 76m다. 입구에서부터 정상까지 200m쯤의 계단을 설치, 규모만 짐작하고 있을 뿐 진시황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등 주곽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할 만큼 방대한 규모다.

사기에 따르면 내와 강을 이룰 엄청난 양의 수은을 이용, 지하궁전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미뤄 도굴이 힘들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병마용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주장이 최근 나와 중국 고고학계를 시끄럽게도 했다. 건축학자 천칭위안(69)은 진시황릉과 병마용 발견지점이 거리가 너무 멀고 병마용 갱이 고대 황릉과는 달리 시황의 동쪽에 위치한 점을 들어 별개의 유물이라고 주장했었다.

어쨌든 이번 발굴을 통해 진시황과 고고학적 최고 가치에 이를 부장품을 발견했을 경우 황하문명의 우월성을 내세우면서 중국은 다시 거들먹거릴 것이다.

황하, 그 강은 유라시아의 황토 문화를 만들어 낸 땅인 동시에 중화제국의 상징이 되겠지만 황색 넘실거리는 물줄기가 거쳐 가는 땅마다 그 물을 마시고 살아온 이민족들에게는 삶과 문화의 무거운 질곡이기도 했었다는 점을 알아야 세계로부터 중국은 진정으로 존경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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