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작가가 만난 ‘이 한 사람’
김수웅 원로 방송인(前 KBS대구총국장)

김수웅 원로 방송인

어떤 이의 삶은 살아온 자체로 역사가 된다. 지나간 세월을 겪어낸 다양한 분야의 원로들이 그렇다. 김수웅 선생이 포항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59년이다. 국산 라디오가 처음으로 생산된 바로 그 해이다. 라디오가 영화와 더불어 대중문화의 꽃이던 시절이다. 당시 서울의 라디오 보급률은 60%가 넘었지만, 포항 지역에서 라디오 수상기가 있는 집은 전체 가구의 10%도 되지 않았다. 전국의 라디오 보급률인 20%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방송국은 번듯한 건물이 아닌 이동 방송차였다. 라디오 없는 집이 수두룩하니 포항초등학교 운동장이나 영일군청, 관공서의 전봇대와 가로수에 앰프를 설치해서 방송을 나눠 들었다고. 지금에야 방송이 넘치는 시대지만 그때 방송을 나눠 들으며 같이 웃고 울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KBS포항방송국 기자와 PD를 거쳐 KBS대구총국장을 지내며 평생을 방송계에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현장을 국민들에게 알려온 김수웅 선생의 지나온 삶을 들어봤다.

 

포항 이동방송국서 기자생활 시작, 정식 승격 후 PD로 복귀하며 평생 방송인의 길 걸어

육영수 여사 서거, 12·12사태 등 격동의 시대 몸으로 겪으면서도 본분 지켜 크게 인정받아

대구방송 총국장 때 만든 낙동강 환경 다큐·경북지사 초청으로 독도 밟던 순간 기억에

-방송과 인연을 맺은 지 반세기가 지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포항 이동방송국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59년 7월이었다. 그때 포항국은 포항중앙초등학교 옆인 포항시 북구 동빈로 1가 84번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병부대에서 제공한 야전용 퀀셋(Quonset: 벽과 지붕이 반원형으로 연이어진 조립식 막사) 사무실과 이동방송차가 방송국이었다. 이때 출력은 250W로 포항시와 영일군 일대가 가청 지역이었다. 퀀셋 옆에 보이는 유리창 안에 아나운서 부스가 있었고, 이동방송차의 조정실 엔지니어와 서로 보면서 방송을 진행할 수 있었다.

 

포항방송국 방송과장 시절 자문위원들에게 브리핑하는 장면(1978년 경)
포항방송국 방송과장 시절 자문위원들에게 브리핑하는 장면(1978년 경)

-기자라는 직업이 생소할 때가 아닌가.

△그때는 중앙일간지의 지방판이 없었던 시절이라, 라디오로 전하는 하루 3번의 지방 소식에 지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 출입처 관계자들과 지역 신문사 선배 기자들도 호의적이어서 올챙이 기자 노릇이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자체 제작한 방송은.

△하루 1시간 30분 전후의 자체 방송을 했다. 일일 3회의 지방 소식과 정오 서울 뉴스에 이어 방송된 대중가요프로그램 ‘노래꽃다발’의 인기가 대단했다. 음향기기와 음반을 판매하는 전파사에서 점포 밖에 스피커를 내놓고 중계할 정도였다.

또한 주 1회 해병 장병을 위한 ‘해병의 밤’이란 30분짜리 프로그램도 방송했다. 앞부분 5분간의 군사 소식을 담당한 해병 포항기지사령부 정훈참모부의 김남호 중위는 전역 후 동아방송의 아나운서가 되었다.

 

-기자 시절의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1960년 3월 초의 일이다. 최인규 내무부장관(4·19 이후 체포)이 3월 15일에 실시되는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포항을 방문했다. 자유당 후보인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출입처이던 포항지방해무청장실에서 장관을 인터뷰했다. 제대로 된 휴대용 녹음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암펙스 601(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암펙스 사에서 생산된 휴대용 테이프 녹음기)’로 엔지니어까지 동원해야 녹음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난다.

그리고 다음 달에 공보실 방송관리과 주관으로 실시된 제1회 방송기자 강습에 참여했다. 전국의 각 지역국에서 한 명씩, 남산에 있는 서울중앙방송국에 모였다. 수료일을 하루 앞두고 4·19혁명이 일어났고 예정되었던 강의와 수료식이 취소되었다. 근무지로 돌아와 열흘 정도 후에 우송된 수료증은 마산방송국의 선배 것과 뒤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돌려받기는 했지만 4·19 직후 어수선한 시대 상황의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기자를 하다 PD가 된 계기는.

△군대에 가면서 촉탁직으로 일하던 기자를 그만두었다. 비록 짧은 10개월의 방송기자 생활이었지만 평생을 방송인으로 살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내가 군 복무하던 1961년에 포항방송국은 이동방송국에서 정식 지방방송국으로 승격했다. 포항방송국에 PD로 복귀했을 때는 청사가 덕산동으로 이전되어 있었다(이동방송국으로 시작한 포항 KBS는 이후 덕수동, 해도동, 상도동 시절을 거쳤다). 자체 방송 시간은 2시간 30분 정도로, 뉴스와 아나운서가 제작하는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모두 내가 담당했다. PD가 적성에 맞았든지 신나게 일했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해병제1상륙사단 연병장에서 열린 파월 청룡부대 결단식도 포항국에서 담당했다. 월남전에 파병된 청룡부대의 훈련하는 모습을 취재해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출항하는 날 전국으로 방송했다. 당시에는 녹음테이프를 제작해 우송했다.

 

포항이동방송국 기자 시절(1959년 7월~1960년 5월, 중앙 뒤편이 김수웅 선생)
포항이동방송국 기자 시절(1959년 7월~1960년 5월, 중앙 뒤편이 김수웅 선생)

-포항은 특히나 해병대와 인연이 깊지 않나.

△해병대는 1958년 해병포항기지 사령부가 정식 발족했고, 그해 10월 KBS포항이 이동방송차로 첫 전파를 쏘아 올렸다. 포항에 터를 잡은 시기가 비슷하다는 인연이 있다.

1968년에 해병제1상륙사단 창설 13주년을 맞아 ‘우리의 해병’ PD였던 나는 사단장의 감사장을 받았다. 포항방송국 개국 이래 방송해 온 ‘해병의 시간’ 프로그램이 장병들의 사기진작은 물론 포항시민과 장병 간의 유대 강화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고 평가받았다.

-포항에서 근무하며 기억에 남는 제작 프로그램이 있다면.

△종합제철이 들어서기 전, 대송면에 밍크 키우는 농장이 있었는데 규모가 꽤 컸다.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농장이라 15분짜리 탐방프로 ‘밍크농장’을 제작했다. 공보부 방송관리국에서 주관하는 지역순회방송 합평회에서 우수상을 받아 이후 서울에 진출할 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1969년 봄 개편 때, 아침 시간대에 5분짜리 만평프로그램 ‘라디오 공원’을 신설했다. 대구방송국 성우였던 김삼일 씨(전 포항시립극단 상임연출)가 만평에 어울리는 구연을 해주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시간대에 나간 ‘일요방담’이란 프로그램에서 PD인 내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지역 인사 서너 명과 세계적인 화젯거리와 지역의 관심거리를 방송했다.

그 시절 서울에 진출하여 전국 대상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명동에 있는 중앙국립극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는 문공부가 인사를 담당해서 가능했다.

-중앙국립극장에서는 어떤 업무를 담당했나.

△관리업무 전반에 관한 일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웃지 못할 일화도 한둘이 아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다. 극단 산하(山河)의 ‘왕교수의 직업(차범석 작)’이 끝난 다음 날 출근해 보니 ‘만원사례’라고 도장이 찍힌 봉투에 5백 원짜리 지폐가 들어있었다. 입장권이 매진되면 직원 모두에게 사례하는 관례라고 했다. 8개월 반의 짧은 기간이지만 또 다른 예술의 세계를 경험하는 귀중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지나왔다.

△70년대 초반 중앙방송국 라디오부로 발령을 받아 드라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의 프로그램을 두루 섭렵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당시, 광복절 기념식을 중계하면서 총성이 울리는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방송인의 본분에 임했고 관련 중계와 특집방송 운행에 노력한 공로로 사장 표창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12·12사태 당시 방송국에 군인들이 들이닥칠 정도로 격동의 시대를 몸으로 겪었다. 1980년에는 TV 시대에 대응하는 라디오의 활로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일찍이 없었던 큰 변혁이 이뤄냈다. 88올림픽 때는 방송조정관으로 해외 중계진을 지원했으며, 그 해 말 올림픽 기장(문화장)을 받았다.

-30년 넘게 방송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을 꼽는다면.

△90년대 초 ‘R제작1국 부국장 겸 1R제작부장, R제작1국장 직무대리’라는 긴 이름의 발령으로 제작부서를 관장했다. 방송역사상 초유의 방송 파업사태가 발생했을 때였다. 방송 민주화를 외치며 촉발된 파업은 36일간이나 이어졌고, 아끼는 후배들이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다. 간부들 중심으로 시간 메우기식 방송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가 31년 방송 생활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4·19혁명 직전 당시 최인규 내무부장관을 인터뷰하는 장면(1960년 2월)
4·19혁명 직전 당시 최인규 내무부장관을 인터뷰하는 장면(1960년 2월)

-90년대 초반에 대구 지역 책임자가 되어 포항 지역까지 관할했다.

△1992년 3월에 대구방송총국 총국장으로 발령받았다. 방송은 물론, 행정, 기술, 관할 지역국까지 감독해야 하는 자리였다. PD 출신 총국장으로서 가장 큰 보람은 일선 PD와 머리를 맞대고 페놀 사건 이후 낙동강의 환경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을 진두지휘한 일이었다. 5부작인 데다 편당 50분이나 되는 대형 프로그램이라 제작비와 장비 동원, 인력 운영에도 어려움이 컸던 만큼 성취감도 있었다.

그리고 독도를 처음으로 밟던 순간도 잊을 수 없다. 이판석 경북지사의 초청으로 울릉중계소를 거쳐 독도에 갔는데, 선착장 시설이 미비해 접안에서 상륙까지 쉽지 않았다. 독도 언덕에서 검푸른 빛깔의 동해를 바라보며 또다시 독도 흙을 밟을 기회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 후 독도를 가보지 못했다.

-은퇴 후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

△KBS 사우회에 독서토론위원회를 조직해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 ‘갈대속의 영원’이 기억에 남는다. 알렉산더 대왕이 ‘일리아스’를 전쟁터에서도 지니고 다니면서 펼쳐봤다는 대목을 감명 깊게 읽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본 소회가 어떤가.

△지난날의 자료들을 찾아보니 너무도 부족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수첩들을 펼쳐보니 왜 그렇게 간단히 기록했는지, 나도 모를 암호 같은 구절도 많았다. 관계자료를 철저하게 보관하지 못해 여러 뜻 있는 일들을 자세하게 남기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방송 현업에서 물러난 지 어언 30년이 되어 간다. 이제는 방송을 편안히 보고 즐기며 들을 수 있으련만 아직도 그렇지 못한 것은 은퇴방송인의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배은정 작가

김수웅 전 KBS대구총국장은

1936년에 포항 학산동(현 중앙동)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 포항중·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포항이동방송국에서 기자와 PD로 활동하다가 한국방송공사 PD, 포항방송국 방송과장과 대구방송총국 총국장, 한국방송공사 방송연수원 교수 등을 지냈다. 은퇴 후 KBS 사우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사우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