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태 ① 최원수의 집안과 청년 시절

최승태 선생

경북사격연맹 회장을 지낸 최승태(崔升泰) 선생을 만나 부친 목운(木雲) 최원수(崔遠壽, 1912∼1987)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최원수 선생은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분으로 남은 기록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그의 남다른 정치 역정을 보면 우리가 이어가야 할 뜨거운 정신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최승태 선생이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며 부친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데에는 최승태 선생과 오랜 세월 함께한 김기철 선생의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조부는 원칙주의자였어. 독학으로 한의사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분이셨지. 포항서 구생한의원을 운영했는데 대지만 300평이 넘었지.

우리 집안은 원래 흥해에 있었어. 아버지 최원수 선생은 흥해국민학교 입학 전에 소학·대학을 다 뗐다고 해. 지역서 신동 났다는 소문이 퍼졌지. 국민학교 졸업 후에 당시 국내 최고 명문인 경기고보에 수석입학 후 일본유학길에 올랐지만 전쟁이 심화되면서 결국 귀국할 수밖에 없었지.

동향에 동창, 일본 유학생이라는 공통점으로 코오롱그룹 창업주인 이원만과 검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김장섭과 가깝게 지냈어.

김도형(이하 김) : 근황은 어떠신지요?

최승태(이하 최) : 나이도 있고 하니 조용히 보내지. 지인들과는 틈틈이 연락하면서 일이 있으면 바깥에 나가기도 하고.

김 : 선생님 집안은 원래 흥해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최 : 맞아. 포항으로 나오기 전에 흥해에 있었지. 할아버지가 흥해에서 한의원을 하셨거든.

김 : 조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

최 : 할아버지 이름은 최봉래(崔鳳來)야. 독학으로 한의사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분이셨지. 지금 포항세무서 건너편에서 구생(九生)한의원이라는 큰 한의원을 하셨어. 당시 포항에서 가장 큰 한의원이었을 거야. 한의원은 입 구(口) 자의 적산가옥으로 대지만 300평이 넘었거든. 나중에 포항역 앞으로 옮겼는데 거기도 대지가 300∼400평 정도 되었어. 6·25 전쟁 때 두 군데 모두 소실되었고, 전쟁 후에 덕수동에 한옥으로 한의원을 새로 지었지. 할아버지는 포항노인회 회장을 맡으셨는데 1962년에 돌아가셨어. 작고하기 직전까지 진료를 보셨지.

김 : 조부께서 남긴 일화가 있는지요?

최 : 한마디로 원칙주의자였지. 꼬장꼬장하셨어. 1950년대에 이런 일화가 있어. 제3대 부통령인 함태영이 포항에 왔다가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며 어디로 오라는 연락이 왔어. 그런데 할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어. 나어린 함태영이 찾아와야지 내가 왜 그를 찾아가느냐고 말이야.

함태영(1872∼1964)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3·1 운동 후에 주동 인물로 잡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광복 후에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김 : 부친 최원수 선생은 어린 시절을 흥해에서 보내셨는지요?

최 : 아버지는 흥해국민학교에 입학하셨는데, 그전에 서당에 다녔어. 청하에서 기청산수목원 가는 길에 있는 서당이었는데, 그곳에서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다 뗐다고 해. 흥해에 신동 났다는 소문이 퍼졌지.

김 : 최원수 선생이 흥해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보에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들었습니다.

최 : 맞아. 흥해에서 국내 최고 명문인 경기고보에 수석 입학을 했으니 흥해가 떠들썩했겠지.

1899년 개교한 경기고등학교는 1922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38년 4월 1일 경기공립중학교로 또다시 교명을 개칭했다. 따라서 최원수 선생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흥해초등학교는 1908년 4월 4일 사립 의창소학교(義昌小學校)로 인가가 나면서 개교했고, 1911년 3월 18일 흥해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가 났다. 1937년 의창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의창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1946년 흥해국민학교로 변경되었고, 1996년 현재 교명이 되었다. 1970년 흥해서부초등학교, 1998년 흥해남산초등학교가 흥해초등학교에서 분리 개교했다. 흥해초등학교는 1906년 3월 11일 개교한 연일초등학교(개교 당시 사립 광남학교)와 더불어 포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초등학교다.

김 : 최원수 선생이 어릴 때부터 친분을 나눈 분은 누구십니까?

최 : 코오롱그룹 창업주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이원만과 검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한 김장섭이 있지. 두 사람은 아버지와 동향(同鄕)에 흥해국민학교 동창이어서 가깝게 지냈어. 아버지와 이원만, 김장섭 모두 일본 유학생이라는 공통점도 있고. 어머니가 칼국수 끓이는 솜씨가 좋았는데 이원만과 김장섭이 이따금 우리 집에 칼국수를 먹으러 왔지.

니혼대학(日本大學)을 중퇴한 이원만(1904∼1994)은 경북 영일군의 산림을 관리하는 산림 기수보로 근무하다가 1933년 일본 오사카로 떠나 1935년에 광고용 모자를 생산하는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창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코오롱그룹의 창업주로 우리나라에 나일론을 최초로 들여와 ‘현대판 문익점’이라 불린다. 정부에 수출입국, 공업단지 조성을 건의하고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조성을 이끌었다.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제6, 7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대구 동구)을 지냈다.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김장섭(1909∼1993)은 일본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일제강점기 때 판검사를 했으며 1954년에 서울지검 검사장을 했다.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내무부와 농림부의 차관을 지냈다. 1960년 1월 제4대 총선 보궐선거(영일군 을)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되었고 4·19 혁명 후 참의원(무소속)에 당선되었다. 이후 제6, 7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포항시·영일군·울릉군)을 지냈다. 오천중학교와 동해중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서울 탑골공원에 모인 재경영일학생회 회원들.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원수(1928. 1. 22.)
서울 탑골공원에 모인 재경영일학생회 회원들.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최원수(1928. 1. 22.)

김 : 경기고보를 졸업한 후에 일본 유학길에 오르셨지요?

최 :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에 입학했는데 졸업은 못하고 중도에 귀국했지.

리쓰메이칸대학교는 1900년 일본 교토에서 설립된 사립 종합대학교다. 간사이대학(関西大學), 간사이가쿠인대학(関西學院大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과 함께 일본 간사이 지역의 4대 명문 사립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김 : 중도 귀국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최 :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서 일본에 있던 조선 유학생들의 삶도 고달파졌지. 한반도는 물론 일본 열도에서도 온갖 무리한 일이 벌어졌고, 조선 유학생들은 결국 견디기 힘들게 된 거야. 단적인 예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어 단무지 하나로 밥을 먹었다고 하더군. 아버지는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귀국하셨지.

김 : 귀국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최 : 포항으로 돌아와 형산면사무소에서 몇 년 근무하셨어. 일본 유학을 해서 일어에 능통했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을 평생 구독하셨지.

김 : 일제강점기 때 포항에도 일본에 유학 갔던 조선인 자녀가 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최 : 지금의 중앙상가 북포항우체국 앞에 나가면 하오리(羽織)를 입고 뒷굽이 높은 게다(下駄)를 신은 일본 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

지역 원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제강점기 때 동해안은 어자원이 풍부해 포항·영일에서도 수산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이 꽤 있었다. 이들 중에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최승태

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