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한경식 ②
태백에서 포항까지

초창기 롬멜하우스 멤버들.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한경식.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바다를 지키는 함장이 되고 싶었던 청년의 꿈은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로 꺾이고 만다. 그러나 마냥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950년대의 청년들에겐 ‘고민의 시간’마저 사치였으니까. 20대 중반이던 한경식 선생은 광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꿈을 모색한다.

 

1968년 5월 15일 포항 건설본부 전기 담당으로 발령받아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시발택시를 타고 동촌동에 내렸어. 아름드리 소나무밭 오솔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가니 나무와 슬레이트로 지은 2층 건물이 보였어. 이른바 ‘롬멜하우스’로 불린 포항제철건설본부였지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결심했어. 그건 우리나라 경제를 탄탄한 토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사명감과도 결부되었지. 아직도 기억나. 당시 공장 건설에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였지.

홍성식(이하 홍) : 해군사관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경식(이하 한) : 4학년 때 육·해·공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우승하고 객기에 그만 실수했어. 그때는 사관학교 학생이 음주하면 안 되던 시절인데, 들뜬 기분에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셔버린 거지. 그게 문제가 돼 해군사관학교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퇴교하게 되었어. 하지만 해군사관학교를 다닌 경험이 나를 많이 성장시켰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한길로 달려가는 기백과 희생정신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세월이 많이 흐르고 50대 중반이 된 후에는 해군사관학교 13기 동기들이 “너도 사회에서 해군사관학교 출신들 이상으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살았다”면서 동문으로 대접해주니 고맙지.

홍 : 해군사관학교 퇴교 후에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한 :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하니 광주로 가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어. 그러다가 전남대학교 전기공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지. 1, 2학년 과정을 면제받은 건 해군사관학교에 다닌 경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어. 사실 내가 어릴 때도 공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어. 대학 다닐 때 학원강사도 하고 입주 가정교사도 하면서 학비를 벌었지.

홍 : 해군사관학교 4년과 전남대 2년을 마친 후 첫 직장은 어디였나요?

한 :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시험을 치고 들어가 7년쯤 다녔어. 우리나라에 발전소가 생기면서 특별한 프로젝트를 맡길 사람을 뽑는데 그때 입사하게 되었지. 수백 명의 응시자 가운데 다섯 명을 선발했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어. 강원도 태백 장성광업소 전기 파트에서 근무했지.

대한석탄공사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1일 설립되었으며, 석탄 광산 채굴과 석탄 가공제품의 매입·매출·수출입 등을 담당했다. 한국석유공사처럼 일부 석탄이나 석유를 정부의 명령에 따라 비축하기도 했다. 한때는 국내 최고의 공기업으로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1980년대 말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사양화의 길을 걸었다.(‘위키백과’ 참조)

홍 : 거기선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한 : 당시는 열악한 한국의 전기 설비를 선진적인 형태로 변화시키던 시기였는데, 그 과정에서 작지만 한몫했다는 긍지가 있어. 당시 내 월급이 한국전력 직원들보다 50퍼센트쯤 많았지. 대한석탄공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나는 나라 발전의 기초가 되는 석탄을 생산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원 복지도 나쁘지 않았지. 사택도 딸려 있어 거기서 딸을 낳았어. 7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서 태백이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

홍 : 대한석탄공사에서 포항제철로 옮긴 건 어떤 이유고, 언제쯤인지요?

한 : 태백이 워낙 벽지라서 커가는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나도 전기와 관련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어. 그런데 마침 포항제철에서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신문에 난 거야. 부랴부랴 서류를 준비해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시험을 봤어. 운 좋게 합격해서 1968년 5월에 포항제철에 가게 된 거지. 자랑 같지만 입학시험과 입사시험에서 떨어진 적은 없는 것 같아.(웃음) 포항제철 입사시험은 짧은 기간 준비했는데, 거기 내가 예상문제로 공부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논술 문제가 출제됐더라고.

 

포항 동촌동 부연사에서 포항제철 직원들.
포항 동촌동 부연사에서 포항제철 직원들.

홍 : 발령을 받아 포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어땠습니까?

한 : 상상을 벗어나는 풍경이었지. 지금과는 달리 그야말로 깡촌이었어.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인근에 수녀원만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공장 건설에 필요한 전기 시설을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었지. 종일 반트럭(바퀴가 4개 달리고, 뚜껑 없는 적재함이 설치된 소형 트럭)과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리면서. 지금 청년들은 이해하기 힘든 시절이자 상황이었지.

홍 :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해주시죠.

한 : 1968년 5월 15일 포항 건설본부 전기 담당으로 발령받아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시발택시를 타고 동촌동에 내렸어. 아름드리 소나무밭 오솔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가니 나무와 슬레이트로 지은 2층 건물이 보였어. 그게 이른바 ‘롬멜 하우스’로 불린 포항제철 건설본부였지. 거기에 먼저 온 김명환 소장과 박용진 차장이 있더군. 나는 쉽게 이야기하면 맨 아래 졸병이었지.

홍 :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한 :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결심했어. 그건 우리나라 경제를 탄탄한 토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사명감과도 결부되었지. 아직도 기억나. 당시 공장 건설에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였지. 그게 이른바 ‘우향우 정신’이야. 목숨을 걸고 일하던 시기였어. 그때 롬멜 하우스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장 건설’이란 구호가 내걸렸지.

홍 : 포항제철 입사 후 맡았던 주된 업무는 뭐였습니까?

한 : 처음엔 내 전공인 전기 관련 업무, 그러니까 공사용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 전화 인입 등의 업무만 하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천만에. 하천과 돌산의 건설용 골재원 조사와 시료 채취 후 서울 본사 송부 작업, 주택단지 선정 기본 조사에다가 표토 제거, 착공 준비, 공장이 설 자리에 대형 공장 표시기 제작 설치, 정부 지원사업의 진도도 파악해야 했어.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

홍 : 선생님만이 아니라 포항제철이 만들어지던 시기엔 직원들 모두 그렇게 바빴겠지요?

한 : 말해 뭘 하겠어. 집을 떠나 포항으로 온 대부분 직원은 당시 동촌동에 있던 사찰인 부연사에서 숙식을 해결했어. 책임자인 박종태 소장은 롬멜 하우스에서 군대용 야전침대를 깔고 혼자 잤지. 그런데 어느 날은 자다가 모기장을 건드렸는지 아침에 보니 모기에 물린 자국이 여기저기 벌겋더군. 그래도 짜증 내지 않고 사람 좋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

‘포스코 50년사’에 따르면 포항제철 건설 초기의 슬로건은 ‘제철보국(製鐵報國)’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1978년 3월 박태준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철은 산업의 쌀이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 소재다.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고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이다.”

홍 : 직원들 간의 화합은 어떻게 이뤄나갔는지 궁금합니다.

한 : 포항제철 건설 초기 멤버들은 대부분 이전 회사 경력이 있는 직원들이었어. 대한중석, 대한석탄공사, 호남비료 등 여러 회사에서 발탁되거나 공모를 거쳐 채용된 사람들이지. 그래서인지 저마다 개성이 강하고 일 추진 방식이 달랐어. 업무에 관한 이해도와 관련 지식의 깊이도 천차만별이었고. 사실 그로 인한 불협화음이 없지 않았어. 하지만 그때 열두 명의 직원은 소장과 아침마다 체조하며 업무를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힘을 모았어. 우리가 포항제철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겠다는 굳은 의지로 하나가 된 거지.

홍 : 지금도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적지 않겠습니다.

한 : 당시 가장 어려웠던 업무 중 하나는 매주 건설 현황을 사진과 함께 서울 본사에 보고하는 일이었어. 자체로 진행하는 공사야 문제가 없었지만, 정부 지원을 받는 사업인 항만, 공업용수, 도시토목, 한전 관련 공사, 전화통신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거의 유일했던 교통수단인 반트럭에 올라 종일 돌아다녔어. 사진을 찍으려고 정부 각 지원사업 현장을 찾았고, 관청의 공사감독에게 계약 사항, 공정표, 매주의 실적 등을 물었지. 진땀 흐르는 일이었어. 대체로 협조를 잘해주었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협조 체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이를 건의했지. 그래서 생긴 조직이 ‘현지공사 조정통제위원회’야. 이후엔 매월 한 번씩 회의를 열어 공정을 파악하고 각 부문의 협조를 쉽게 만들었지.

한경식

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

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

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한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