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

김한길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

예술은 특정한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향유하는 권리이다. 이 같은 예술의 공공적 가치는 공립예술단의 존재 근거가 된다. 전국에 산재한 국공립극단이 만나는 ‘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올해로 14회를 맞았다. 내일(오는 5일)부터 한 달여간 전국 8개 극단이 경주를 찾는다. 축제를 주관하며 피날레를 장식하는 경주시립극단의 김한길 예술감독을 만났다. 경주시립극단 출범 이후 가장 젊은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지난 7년간 경주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경주말과 지역민의 정서를 담아왔다. 창작인으로서의 꿈과 고뇌, 지역 연극 발전을 위한 공립극단의 역할까지 그의 고민은 깊었다.

 

열네번째 맞는 ‘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

전국 8개 극단 지역소재·사투리 담은 작품 올려

‘대한민국 연극제'와 함께하는 축제로 확대 바라

경주시립극단 이끌며 경주 말·정서 담기에 매진

‘에밀레 극단'·‘극단깨비' 등 쟁쟁한 창작진들과

경주브랜드 알릴 다양한 작품 만들기에 나설 것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지 벌써 7년이 됐다.

△임기 2년으로 와서 지금까지 있을지 몰랐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좋은 분이어서 몇 년째 같은 집에 산다. 민간에서 공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책임감과 부담감이 컸고 공립극단으로서 역할을 고심했다. 지역민에게 문화적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우선을 두고 경주의 브랜드가 될만한 소재 발굴을 고민해 왔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였나.

△경주말과 경주 사람의 정서를 담으려 했다. 오태석의 연극 ‘자전거’를 경주 사투리로 바꾸고, 경주를 배경으로 손기호 작가가 쓴 ‘송화꽃 지면 송화 날리고’를 연출했다. 경주를 소재로 극을 쓰고 연출한 작품도 꽤 있다. 경주 웃시장(성동시장)과 아랫시장(중앙시장)을 무대로 한 악극 ‘바람아 구름아’,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경주 남산과 삼릉을 배경으로 만든 ‘동경이의 마술피리’ 등이다.

-경주시립극단을 이끌면서 역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콘텐츠를 다양하게 선보이려고 노력했다. 코미디 작품 다음은 따뜻한 가족사, 그다음은 묵직한 주제 혹은 친근한 소재의 작품을 배치했다. 코로나로 공연이 힘들 때는 웹드라마도 제작했다. 관객 접근성에 중점을 두다 보니 아직까지 과감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해 본 적은 없다.

-경주에 오기 전부터 극단 ‘청국장’을 이끌며 소시민의 일상을 세밀하게 풀어내는 연극을 해왔다. 연극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고교 시절 별생각 없이 들어간 연극반에 깊이 빠졌다. 연극을 가르쳐 줄 교사가 없어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웠다. 첫 무대는 철학과 교수였던 강월도의 ‘알’로 기억한다. 난해한 내용이라 작품 해석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참여 가능한 인원이 정해지면 서점에서 희곡을 뒤져서 공연작을 골랐다. 진로를 일찌감치 연극으로 정하고 신촌이나 명동, 대학로 무대를 찾아다녔다. 공부는 뒷전이니 집에서 좋아할 리 있나. 이근삼의 ‘연극개론’과 성경책을 챙겨서 가출까지 감행했다.

-가출하면서 어떻게 책을 챙길 생각을 했나.

△기독교인도 아닌데 성경책을 챙긴 건 삐뚤어지진 않겠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당시 내게는 그 책들이 안전장치였던 것 같다. 이후로 부모님도 크게 말씀을 안 하셨다. 그러다 극단 ‘로얄 씨어터’의 ‘삼일로창고극장’이 건너 골목으로 이사를 왔고,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극단에 들어가 포스터부터 붙였다. 선배의 대타로 첫 무대에 올랐고, 제대 후 창작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차’로 정식 데뷔했다.

-배우로 연극을 시작한 것인가.

△그렇다. 연기를 하면서 뭘 자꾸 끄적이는 날 보더니 당시 ‘로얄 씨어터’ 연출이던 류근해 상명대 교수가 희곡을 써보라고 했다. 그해 서울예대 극작과에 진학했다. 쟁쟁한 98학번 동기들과 희곡을 쓰고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뮤지컬 스타 정영주와 극단 ‘여행자’의 김은희 대표, 한윤섭 아동문학가 등이 동기다.

-극단 ‘청국장’을 오랫동안 이끌고 있다.

△처음에는 대학 친구들과 극단 ‘누에’를 창단했다. 간결하면서도 주제를 압축하는 단막극이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대학 은사의 권유로 비롯됐다. 생활전선으로 나가는 단원들이 많아 오래가지 못했다. 극단 ‘청국장’은 내가 쓰고 연출한 ‘장군슈퍼’와 ‘사랑의 피아노’ 스텝들과의 의기투합이었다. 고초균으로 발효되는 청국장과 연극 작업이 비슷하다고 술자리에서 이름을 지어놓고 다음날 진짜 그걸로 할 거냐고 확인하고 그랬다.

-소시민의 담백한 삶에 가치를 두는 이유는.

△한 작가의 작품은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지나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을 거친다. 무대는 일상과 다른 공간이고 허구의 이야기가 극적인 언어로 펼쳐진다. 무대 언어로 꽉 찬 공간에서 쨍하도록 투명한 일상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은 즐겁다. 주변에서 ‘디테일 김’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확실히 섬세한 일상 묘사에 관심이 크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자면 주로 소극장에서 공연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14년째 이어온다. 페스티벌에 대한 연극계의 인식이 궁금하다.

△공공극단의 유일한 페스티벌로 의의가 크다. 각 지역의 공립극단은 지역의 소재와 사투리의 가치를 담은 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각 지역에 소속되어 있고 단 1회 공연이라 신작을 선보일 수 없어 아쉽다. 전국의 공립극단이 지역 민간 연극단체와 교류하며 연극의 발전에 힘쓰는 만큼, 국공립극단 페스티벌과 대한민국연극제가 서로의 곁을 내어주며 연극계 전체의 축제로 확장하는 것도 제안하고 싶다.

-‘공립’과 ‘극단’은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

△국공립 단체의 예산은 세금이다. 내 또래의 연극인들은 대부분 대리운전을 비롯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안정적이라는 것은 장점이자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월급이 ‘연극쟁이’로서의 기질을 앗아간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지만 개선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공익성과 공공성 추구라는 공립극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고 있다. 시민연극교실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찾아가 그림책을 읽어주는 ‘경단(경주시립극단)이와 떠나는 그림책 여행’이 고민의 산물이다. 더불어 공공적 기반을 활용해 지역 연극계를 활성화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경주시립예술단 단원들과 함께.
경주시립예술단 단원들과 함께.

-경주 지역 연극인들과도 교류를 하나.

△경주 연극계는 토양이 훌륭하다. 경주시립극단의 모태가 된 ‘에밀레 극단’이 건재하고, 인형극으로 출발한 ‘극단 깨비’는 장르를 넓히는 등 쟁쟁한 창작진이 모여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 공공 영역이 민간을 포용하면서 지역 연극계가 발전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탄탄하고 안정적이지만 신선함에 목마른 공립극단과 예술혼으로 활활 타오르는 민간 영역이 상호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다양한 시도를 모색해 볼 가치가 있다.

-페스티벌 폐막작으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일제강점기 실제로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경주에서 일어난 세금마차 탈취사건을 다룬 연극이다. 무대에서 한번 관객을 만난 작품은 연습 과정에서 농축된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나갔던 대사가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 사이 연극은 숙성된다. 보통은 두 달 연습해서 사흘 공연하니 늘 아쉽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를 2주간 공연한 적이 있다. 작품에 자신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수요 관객이 그만큼 안될 것이란 우려가 컸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갈수록 관객이 늘었다.

-올해의 참여작 성향은 어떤가. 주목되는 작품을 소개해준다면.

△가족 콘텐츠가 늘었다. 새로운 형식이 기대되는 무대는 경남도립극단의 오브제음악극이다. 수원시립극단은 권호성 예술감독이 부임하고 첫 작품이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악극을 자주 공연하는 경산시립극단의 무대에서 악극의 노하우를 살펴봐도 좋겠다. 한 인물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조명하는 ‘전명출 평전’을 인천시립극단이 어떻게 녹여낼지도 궁금하다. 옆 동네 포항은 물론이고 어린이극으로는 첫선을 보이는 목포, 작년과 동일한 작품으로 농익은 정도를 살피기 좋은 부산도 기다려진다. 작년 페스티벌에서 전 작품을 모두 관람한 관객이 200여명이었다. 올해도 여덟 작품 모두 놓지지 않길 바란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과 배우와의 포토타임, 내가 뽑은 최고의 배우상도 즐겨주길 바란다.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시도가 있나.

△더 이상의 일을 벌이기보다 임기를 잘 마무리하려 한다.(경주시 조례상 예술감독의 임기는 연임 3회로 제한된다.) ‘경주시민 연극교실’과 ‘경단이와 떠나는 그림책 여행’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로 관객의 기운을 온전히 받지 못한 ‘동경이의 마술피리’를 제대로 된 무대에 올리고 싶은 바람도 있다.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끝나면 바로 다음 공연을 준비한다. 무언극인 ‘안네의 일기’로 호평을 받은 주혜자 연출이 객원으로 참여한다.

-김한길 감독에게 ‘연극’이란.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다. 연극을 시작하면서 꿈꿔왔던 대부분이 이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꿈을 더 크게 꿀 걸 그랬나 싶다. 나를 대학로에서 경주로 데려온 것도 연극이니, 연극이 또 다른 미래로 나를 데려놓지 않을까. /배은정 작가

김한길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은

서울예대 극작과를 졸업하고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4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극단 ‘청국장’ 대표이다. 극을 쓰고 연출한 ‘장군 슈퍼’로 한국예술위원회 신진예술지원을 받았고, 2006년에는 ‘춘천 거기’로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장군 슈퍼’, ‘슬픔 혹은’, ‘임대 아파트’로 PAF 극작상을 받았다. 2016년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삼도봉 미스터리’,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유쾌한 하녀 마리사’, ‘지금도 가슴 설렌다’,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 ‘장마’, ‘귀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 ‘동경이의 마술피리’, 악극 ‘바람아 구름아‘ 등 12여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