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의 기억, 영일만의 격랑 -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3
강신규 ① 대보에서 구룡포로 이주

강두수씨 소유 포경선 ‘영어호’가 1947년 12월 24일 귀신고래(39자)를 포획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은 강신규씨.

“그 어른 참 대단한 분이셨지.” 구룡포항에서 만난 한 어민이 ‘강두수’ 석 자를 듣고 한 말이다. 구룡포에서 오래 살았다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라고 덧붙였다. 구룡포의 수산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형성되었다. 광복 후 지역 수산업계는 한국인으로 재편되는데, 그 과정에서 구룡포 수산업을 주도한 인물 중에 강두수가 있다. 그는 포항과 구룡포에서 고래잡이를 처음으로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자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구룡포 수산업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60~70년대, 구룡포 수산업을 이끌었던 강두수의 생애를 그의 아들 강신규 선생을 만나 들어보았다.

 

윗대로부터 대보서 살다가 개종하면서 구룡포로 이사 왔어
곰방대를 입에 문 ‘여장부’ 할머니는 담배도 끊고 교회 다녔지

광복 후 일본인들이 빠져나가자 수산행정에 공백이 생겼어
기독학교 나온 부친이 일어·영어할 수 있어 포경선 인수했지
포항·구룡포에서 고래잡이 첫 허가 받은 포경선 선주되기도

구룡포 초대와 3대 조합장을 지내며 구룡포 수산업 이끌어

배은정(이하 배) : 고향 구룡포에서 지내고 계시지요?

강신규(이하 강) : 배를 타지 않지만, 뱃일은 하고 있어. 어선의 사무장을 맡아 출항을 돕고 잡아온 고기를 새벽 경매시장에 내다 팔지. 선원을 충당하는 것도 내 일이야.

배 : 1947년생인데, 어린 시절의 구룡포를 기억하시나요?

강 : 구룡포항은 지금과 다르게 모래사장이었어. 모래사장을 매축(埋築)해 항구를 만든 거지. 구룡포항 맞은편 대로변의 적산가옥에서 살았어. 천장이 높은 다다미방으로 여름에는 통풍이 잘되고 겨울에는 햇볕이 들어 따뜻했어.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고 있지. 다락방은 예전 그대로였는데, 최근에 다 정리했다더군. 1960~70년대의 구룡포는 포항보다 부촌이었고, 우리 집도 부유한 편이었어. 어릴 적에 친구들이 양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닐 때 나는 보온 도시락을 갖고 다녔으니까. 점심시간이 되면 외삼촌이 교실로 가져다주었지.

배 :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강 : 할머니, 부모님과 함께 살았어. 위로 누나가 셋인데 둘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나와 일란성 쌍둥이인 형이 그다음이야. 열 살 아래 남동생이 있었고. 어쩌다 보니 둘째 누나와 나, 막내만 살아 있군. 할머니와 아버지, 동생은 몸집이 컸지만 나와 쌍둥이 형은 왜소했어. 우유가 귀한 시절이어서 마을 아주머니들에게 젖동냥을 했지. 그분들을 ‘젖엄마’라고 불렀는데 열두 명이나 되었어. 쌍둥이 형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연탄가스 사고로 먼저 저세상에 갔고. 어머니는 7남매의 맏이였는데, 막내 외삼촌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어.

 

배 : 윗대부터 구룡포를 터전으로 살았나요?

강 : 대보에서 살다가 개종하면서 구룡포로 왔다고 들었어. 할머니가 허씨였는데 한마디로 여장부였지.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장작을 피워 무쇠솥에 밥을 안치던 분이야. 당시는 무속이 강해서 다들 갯바위에 초를 피우고 기도했어. 그러다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선교사의 말을 듣고 개종했지. 찬장 위에 둔 신줏단지를 깨뜨리고 담배도 끊고 교회를 다녔다고 하니 대단한 분이지. 대보 1리에 강씨 문중 입향조 묘가 있지만 개종한 뒤로는 발길이 뜸했어.

배 : 구룡포에서 태어나서 줄곧 고향에서 보내셨나요?

강 : 구룡포교회 부설 유치원과 지금은 폐교된 동부초등학교를 다녔어. 동부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줄면서 구룡포초등학교와 통폐합돼 구룡포생활문화센터 아라예술촌으로 바뀌었지. 중·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다녔어.

배 : 대구로 유학을 가셨군요?

강 : 고모가 대구 남산동에 방을 구해 우리 쌍둥이와 사촌들을 보살폈지. 내가 중·고교를 다니던 때가 1960년대인데, 대구는 4·19혁명의 도화선인 2·2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곳이야. 어린 나이에 시위에 휩쓸렸다가 경마 진압대에 붙잡힌 적이 있어. 당시는 말을 타고 시위를 진압했거든. 다행인지 하숙집 주인이 경마 진압대여서 다시 가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줬지.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한달음에 달려와서 다듬잇방망이를 휘둘렀어. 얼마나 놀랐는지 2층 방에서 뛰어내렸지. 부친의 성미가 불같았거든. 자식에게 굉장히 엄해서 눈도 똑바로 못 쳐다봤지. 그런 아버지도 꼼짝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할머니였어. 누나 셋에 쌍둥이 아들이 둘이어서 할머니가 쌍둥이 아들을 엄청 챙겼어. 할머니에게 우리 쌍둥이는 귀한 손자였기 때문에 손도 못 대게 했지.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 치마폭에 자주 숨었어.

배 : 강두수 선생과 할머니가 닮으셨나 봅니다.

강 : 방학이 되면 바람도 쐴 겸 외삼촌 배를 탔는데, 한번은 저인망어선을 타고 속초 앞바다로 가서 노가리와 기름가자미, 참가자미, 도루묵을 잡았지. 그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어. 얼마나 놀랐던지 그 추운 겨울날 구룡포로 돌아가려고 거의 전쟁을 치렀지. 속초 비행장에서 ‘세기 항공(1960년대 후반 영업했던 국내 항공사)’을 타고 김포로 갔어. 거기서 서울로 이동해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갔지. 대구에서 차를 대절해 구룡포로 왔고. 그런데 돌아가셨다는 할머니가 두 눈 뜨고 살아 계시더군. 할머니 말씀이, 결혼하라고 불렀다는 거야. 쌍둥이는 같은 날에 결혼해야 잘 산다면서 말이지.

배 : 젊은 나이에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어요.

강 : 할머니를 이길 수는 없었지. 결국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형과 같은 날 결혼했어. 결혼하던 날이 마침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구간이 개통되던 날이었어. 웨딩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난생처음으로 달렸지. 그 뒤로도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에 놀러 다녔던 기억이 나. 1970년대 구룡포에는 자동차가 드물었거든.

배 : 살림살이도 할머니가 하셨나요?

강 : 할머니와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 배가 출항하기 전에 준비할 게 많거든. 바다에 나가면 주로 고기를 잡아먹지만 그래도 김치나 된장, 채소를 싣고 갔어. 우리 집에서는 해마다 김장을 몇백 포기씩 했지. 출항하면 김치를 단지에 넣어 갔거든. 메주를 뜰 때면 온 동네에 콩 냄새가 퍼졌지. 물 긷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집 안에 우물이 있었지만 해수가 섞여 짭조름했지.
 

배 : 부친은 어떤 사람인가요?

강 : 아버지는 몸집만큼이나 배포가 컸어. 일을 밀어붙이는 힘도 강했지. 집에서 바깥일은 함구했고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 않았어.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어. 할머니의 먼 친척이 지금은 포항제철이 들어선 동네에 살았거든. 아버지는 그 집에서 대구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해. 선교사가 사위로 삼아 미국에 데리고 가려 했지만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해. 아버지는 공부에 한이 맺힌 분이었어. 자식들이 진학할 학과도 아버지가 정해줬지. 판검사의 위세가 대단할 때라 나한테는 법대를 추천하셨어. 나중에 들으니 수협조합장 시절에 워낙 시달렸다고 하더군. 자식이 법대에 가면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되겠다 싶었던 거지.
 

강두수 초대 구룡포 조합장
강두수 초대 구룡포 조합장

배 : 기독교 학교를 다닌 부친이 어떻게 수산업에 종사하게 되었나요?

강 : 구룡포로 돌아와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산회사에서 행정을 보신 것 같아. 생전의 부친 말씀이 그 시절엔 일본어를 못하면 수산업을 할 수 없었어. 광복 후 일본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수산 행정에 공백이 생기자 일본어를 잘하는 부친이 그 일을 도맡았을 거야. 기독교 학교를 다녔으니 영어 실력도 있었고. 당시 구룡포에서 영어와 일어를 잘하고 수산업 실무에 밝은 사람이 누가 또 있었겠어. 부친은 일본인에게 포경선을 인수해 자수성가했지.

당시 상황을 ‘구룡포수협사’는 이렇게 전한다.

강점기 시절 구룡포의 부를 지배하고 독점했던 일본인들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가치가 높은 적산을 적은 돈으로 인수하여 큰 이익을 남기는 기회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단숨에 지역을 이끌어가는 유지로 성장할 수 있었고 큰 부를 누리게 되었다. 해방 후 어업을 통해 구룡포 지역의 유지로 성장하였던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이상택, 안원수, 최사준, 신석주, 이완백, 고치원, 강두수, 문용화 씨 등이다. <‘해방 후의 수산업과 어업조합’, ‘구룡포수협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2016, 225쪽>

배 : 강두수 선생이 운영한 어선은 몇 척인가요?

강 : 포경선 세 척과 꽁치 배 두 척이 있었어. 흑산도까지 가서 조기와 꽁치를 잡았지. 포경선 생김새는 구룡포읍 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있는 제1동건호를 보면 돼. 실제로 고래를 잡던 어선이야. 고종사촌인 김건호 형님이 기증했지.

강신규

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

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