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수’는 묻는다. “전쟁은 사랑을 이길 수 있을까?”
영화 ‘애수’는 묻는다. “전쟁은 사랑을 이길 수 있을까?”

지난 2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공습하며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모두의 기대와는 다르게 긴 시간 이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 경기 침체 속에서 두 나라의 전쟁은 원유와 천연가스, 곡물 등의 가격을 치솟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세계인의 우려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 경제 문제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양국의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그것을 결정하는 소수의 통치권자가 아닌, 전쟁이 만들어낼 이익과는 무관한 다수 국민의 희생을 불러오는 비극이다. 엄청난 숫자의 사망자와 난민을 양산하고 있는 이 전쟁은 언제가 돼야 끝이 날까? 조속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을 간절한 마음으로 비는 이들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많다. 그들에게 시대와 장소 불문 ‘절대악’이라 불러 마땅할 전쟁의 슬픔과 고통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2편을 소개한다.

태평양전쟁, 한·일 청춘의 비극 다룬 ‘호타루’

영화 ‘호타루’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사에 관한 미움과는 별개로 일본이 무척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나라란 걸 알게 된다.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가고시마의 바다, 삭막해진 마음을 다독여주는 북해도의 설경(雪景), 흑백의 회상 장면에서 투박하게 빛나는 새하얀 포말….

‘호타루’는 반딧불이를 뜻하는 일본어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미국 군함을 향해 목숨을 걸고 날아가던 자살특공대(가미카제·神風). ‘호타루’는 반딧불이가 돼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어 했다는 자살특공대원들의 소원에서 따온 제목이다.

열여섯 어린 소년까지 ‘국가적 대의’라는 조악한 명분으로 희생시켰던 비극적 전쟁의 역사.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은 반전과 평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타루’의 전개는 단순하고 간략하다. 1989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사망한다. 그 죽음은 조용한 어촌에서 전쟁의 상처를 숨긴 채 살아가던 가미카제 대원 야마오카(다카쿠라 켄 분)를 회상으로 이끈다. 연인을 자신에게 맡기고 죽음을 향해 출격했던 한국인 소위 김선재와 지금은 자신의 아내로 살고 있는 김 소위의 여자 도모코(다나카 유코 분), 그리고,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이 죽을 차례만을 기다리던 공간 치란(마을 이름).

영화는 현재의 공간 가고시마와 과거의 공간 치란을 오가며, 국가집단의 광포한 메커니즘이 강제한 전쟁이 개개의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상처는 끈질겼다.

 

흑백 영화 ‘애수’의 한 장면.
흑백 영화 ‘애수’의 한 장면.

맹목적으로 히로히토를 숭배하던 열여섯 가미카제 대원은 백발의 노인으로 변했지만, 일왕이 죽었다는 뉴스를 듣고는 “이제 나의 시대를 끝났다”며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야마오카는 전쟁 때 죽은 한국인 김선재 소위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고, 혼란스러움은 깊은 병을 앓고 있던 도모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44년을 잠복해온 전쟁이 야기한 생채기.

‘호타루’는 억지스런 설정과 어색한 강변으로 ‘반전·평화’를 외치는 유치한 영화는 아니다. 다카쿠라 켄과 다나카 유코의 농익은 연기와 감미로움과 비극적 서정을 동시에 표현한 쿠니요시 료이치의 세련된 영화음악, 눈부신 하늘과 바다의 색깔이 어울린 영화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게 아름다운 풍경과 감미로운 음악은 메시지가 관객에게 건너가는 길을 차단해버렸다. 거기에 더해진 야스오 감독의 과도한 감정 이입은 영화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 식상한 신파극(新派劇)으로 만들어버렸다. 중심을 지켜야 할 감독이 흥분하면 배우도 흥분하고, 덩달아 관객도 흥분하기 마련 아닌가.

그런 이유에서다. “자식을 죽으라고 명령하는 부모는 없다”며 어버이로서의 일왕이 아닌 전범(戰犯) 일왕을 힐난하는 할머니의 눈물도, “나는 대일본제국이 아닌 조선민족과 연인을 위해 출격하는 것이다”는 김선재 소위의 장엄한 유언도, 김 소위의 유품을 가지고 경상북도 안동을 찾아가는 야마오카와 도모코의 비장미 가득한 한국 방문도 핍진성에까지는 가닿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약점도 이해 못할 것 없다. 이것 하나만 잊지 않는다면. 전쟁은 짙푸른 바다와 하늘을 나는 갈매기, 아름다운 설원뿐 아니라 인간까지 파괴하는 악(惡)이다.

전쟁을 경험한 바 없고, 스스로 반전평화주의자라 생각한 적도 드물지만 ‘호타루’를 봤던 날,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가 제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아들을 잃고 그렸다는 판화의 제목이 가슴을 치는 이유는 뭐였을까?

“더 이상 전쟁은 없다!”

 

제2차대전의 비극을 영화화 한 ‘호타루’의 한 장면.
제2차대전의 비극을 영화화 한 ‘호타루’의 한 장면.

전쟁을 이기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라 말하는 ‘애수’

미국이 이라크를 향해 ‘충격과 공포 작전’을 시작했던 2003년 3월. TV 화면이 폭격을 생중계하던 새벽. 평소 알고 지내던 화가 한 명이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는 인류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조차 상실했다”고, “잿더미로 변한 바그다드는 우리들의 양심이 불타버렸음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그녀 목소리에 차마 ”나는 자고 있어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를 쓴 시인 김준태는 천년고도 바그다드에서 미 공군기의 폭격에 사망한 아이들의 피 묻은 눈동자를 곡(哭)했다.

며칠 후.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철학자 리영희(1929~ 2010)가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리고는 말했다.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뿐”이라고. “예수를 믿건, 부처를 믿건, 알라를 믿건 우리는 지상에서 사랑을 아는 유일한 존재 인간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전쟁은 과연 인간의 사랑까지도 파괴할 수 있을까? 영화 ‘애수’를 떠올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무리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붙이더라도 전쟁은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이 딛고 선 세상을 황폐화시키는 악이다.

어떤 국가도 다른 국가의 불행을 강요할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당시 미국이 이라크를 향해 쏘던 미사일과 폭탄,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공격하는 미사일과 폭탄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악.

미사일과 폭탄에는 아이와 여자를 피해갈 수 있는 눈이 달리지 않았다. 전쟁은 인간 안에 숨어있는 악마를 불러낸다. 우리가 경험한 역사는 피 흘리는 목소리로 증언한다. “아무리 좋은 전쟁도 최악의 평화보다 못하다.”

누가 무어라 폄하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은 선(善)이다. 설레는 가슴으로 밤새 서툰 솜씨의 시를 쓰게 만들고, 청맹과니에게 세상을 보게 하며, 음치에게 감미로운 세레나데를 읊조리게 하는 사랑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선.

 

‘호타루’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다카쿠라 켄
‘호타루’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다카쿠라 켄

그런데, 절대악 ‘전쟁’이 인간의 유일한 희망 ‘사랑’을 깨뜨린다면? 마빈 르로이 감독의 영화 ‘애수(Waterloo Bridge)’는 바로 이 최악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처참하게 깨진 청년장교 로이 크로닌(로버트 테일러 분)과 발레리나 마이라 레스터(비비언 리 분)의 비극적인 사랑.

영화팬들 귓가에 맴도는 주제곡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비장미는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흔든다.

세계 제1차대전 와중에 젊은 장교와 예쁜 무용수가 서로에게 끌려 사랑에 빠지지만, 전쟁터로 나간 장교는 돌아오지 않고, 지긋지긋한 전쟁과 자신의 삶에 절망해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자로 전락하는 무용수.

하지만, 전사한 줄 알았던 장교는 살아 돌아오고, 무용수는 연인에 대한 죄책감에 달려오는 트럭에 몸을 던진다.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전쟁은 ‘마이라 레스터’의 행복을 강탈해갔다. 비단 그녀뿐일까? 수많은 연인과 식구들의 헤어짐과 눈물, 이별과 죽음을 강제한 게 바로 전쟁이었다.

영화를 앞으로 돌려본다.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마이라를 잊지 못하는 로이는 그녀가 남긴 마스코트(Mascot)를 매만지며 슬픈 표정으로 둘이 처음 만났던 자리를 서성인다.

전쟁은 둘의 사랑을 온전히 파괴한 것인가? 한 사람의 가슴에서 다른 한 사람을 영원히 추방하지 않는 한 그럴 수 없을 터. 로이의 사랑은 그때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으며, 전쟁은 결코 사랑을 이기지 못했다.

비극의 극단으로 치닫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인간들 가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사랑으로 인해 해피엔딩의 영화처럼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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