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이정희
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일본은 우리의 적인가’, 이 도발적인 제목에 끌려 책을 사고 말았다. 물론 필자는 일본을 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과연 일본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글을 썼을까가 궁금해서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한일 간의 갈등의 핵심에 대해서 저자는 일본의 무가(武家)사회의 칼의 윤리와 한국의 유교사회의 붓의 윤리를 비교하였다. 일본의 무가사회와 한국의 유교사회에 착목해서 차이점을 논한 연구자는 저자 이덕훈씨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2월에 세상을 달리한 이어령씨 역시 한일문화의 이질성에 대해서 무가사회와 선비사회의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 필자 역시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일본의 무가사회의 특징, 사무라이 정신 등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사람은 사무라이, 꽃은 벚꽃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무라이가 되어야 하고, 꽃 중에서는 벚꽃이 으뜸이라는 이야기다. 사무라이와 벚꽃이 지니는 상징성만 연구해도 일본인들의 사고형태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사무라이의 칼의 윤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칼의 윤리에서 최고의 악은 지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승패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기면 힘이 있고, 떳떳한 것이고, 지면 약하고 창피한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싸움에서 지면 반성하고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명예를 극복하고자 할복자살을 한다. 할복자살을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운다. 아니 죽기 위해서 싸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죽음은 때로는 모든 것을 용서받는 경우도 있다. 또한, 무가사회에서 특이한 점은 배신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실리를 위해서는 배신이 통용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유교사회의 붓의 윤리에서는 승패도 중요하나 선악을 중심 가치관으로 본다. 즉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겼을 경우 우리는 그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게다가 배신은 더더욱 허용하지 않는 사회다. 우리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이와 같이 칼의 윤리와 붓의 윤리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상태라면 합일점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선악의 기준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다. 이 보편적인 진리를 일본인들이 깨우친다면 새로운 변화가 일 것이다.

유학시절, 같은 외국인 유학생 중에 타이에서 온 친구와 필리핀에서 온 친구들과 한일관계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다. 이때 그 친구들이 “한국과 일본은 형제들끼 리 싸우는 것 같다”고 말을 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들 눈에는 생김새도 비슷하고 문화도 비슷하다고 본 모양이다. 정말 형제가 지독하게 싸우면 어떻게 될까. 좀처럼 화해하지 못하고, 의절을 하고 평생 안 보고 지내기도 할 것이다. 조금도 화해할 분위기가 아닐 경우 제3자가 개입을 해서 좋아질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선악의 논리에서 대의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려고 하고, 전략적으로 제3자를 이롭게 활용하면 일본이 수그러들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