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양화가 신인숙
1999년부터 선긋기 작업으로
새로운 드로잉 영역 구축하며
독특한 작품 세계 만들어 와
“비대면시대, 예술가 활동 제약
초현실 공간서 작품 생명력 키워”

신인숙 서양화가
“나는 나의 존재를, 내 삶을, 내게 부여된 생명의 시간들을 사랑하는가, 혹은 방관하는가를 생각하며 작업을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어진 어떤 운명에 저항 없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창조하는 것이 아닐까요.”

경주 화단의 중진 신인숙(56) 서양화가는 지난 1999년부터 종이에 펜으로 선을 수차례 그어 새롭고 다른 차원의 드로잉 작업을 선보이며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새로운 미술 언어와 기법, 미술 재료에 관해 꾸준히 연구하고 사유의 폭을 넓히며 사물, 현상에 내포된 메시지와 특징들을 포착해 원숙하고 활달한 붓 터치로 기존 회화의 틀을 벗어난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선보여 왔다. 27일 신 작가와 나눈 그의 삶과 작품 이야기를 정리한다.

-펜으로 종이 위에 선 긋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고등학교 시절 입시 미술학원 수업에서 선을 긋는 것이 데생의 가장 기초적인 첫걸음이었다. 무식한 선 긋기는 조금씩 품위를 갖추어 가면서 선에도 감정이 있고 지성과 온도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형태와 빛의 흐름을 선 하나로 표현하는 마법을 익혀나가는 경이로운 날들이었다.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 꿈속에서 그리는 그림에서 더욱 자유롭게 표현이 되었고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선 긋기 작업이 본격 시작되었다.

-작품 제작 과정과 작품이 주는 의미를 소개한다면.

△예술가의 삶은 구도의 길과 다르지 않다. 예술가는 수행하듯 반복하고 스스로의 길에서 곁가지를 잘라내고 말 없음으로 말한다. 선과 선 사이에 틈이 생긴다. 틈은 선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틈이 없었다면 그저 면이 되었을 것이다. 선을 긋는 이유는 틈을 얻기 위함이다. 선을 긋되 선과 선 사이의 틈을 바라본다. 선과 선 사이의 유연성으로 형상을 이루기도 하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나타나 보이게 하는 것이다.

-선 긋기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미술은 바깥세상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내면의 깊은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색은 꽃의 기억이랄까 우리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꽃. 새의 깃털, 단풍잎. 돌멩이의 무늬, 이끼 낀 숲, 동틀녘의 안개. 해질녘의 공기, 바람결 속에 숨 막히게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어찌 표현하여야 하는가, 오래된 친구의 주름살, 미소, 친근한 숨소리 그 위로를 어찌 표현할까, 예술가라면 그런 아름다움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표현하여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선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신 작가의 그림 소개를 부탁한다.

△바람을 그려보고 싶었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 흔들리는 바람을 따라 내 마음도 몹시 흔들린다. 흔드는 바람, 불, 그것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온전히 태우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이 마음의 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생각의 창고에서 끝도 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들이 떠오르고 사라진다. 바라보면 사라진다. 내 안에 수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들, 이미 지난 일이거나 혹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일들 그것들을 내가 살아야 할 지금은 아니지만 바라다본다.

-작품방식 또한 독특하다.

△내 작품은 모두 종이 위에 펜으로 선을 긋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 완성한다. 독특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작가라면 누구나 다 여러 번 덧칠하고 고민하고 정성을 다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단순한 선을 반복한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 편하다. 잘하고 못함을 잊는다. 행위만 남는다.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면서 떠오르고 가라앉는 생각들을 바라본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오고 가는 것을 바라본다. 바라보면 사라진다.

-신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는 무엇인가.

△나이 든 예술가는 부분적으로 둔감해 지지만 전체적으로 예민해지고 섬세해진다. 그러면서도 버려야 할 것, 쳐내야 할 것을 과감히 쳐낸다. 젊은이처럼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지금껏 살아온 경험과 헛발질에서 마침내 화해하는 것이다. 뭔가의 이끌림을 받듯이 신비로움에 사로잡힌 채 작품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메타버스 갤러리를 구축했는데 반응은 어떤가.

△비대면 시대의 예술가 활동은 양면성을 갖는다. 활동이 정지됨으로 생긴 시간은 메이커스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게 하였고, 코딩과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메타버스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메타버스 공간에 개인갤러리를 구축하는 기회가 되었다. 언택트 시대의 흐름으로 폭발적 수요를 얻은 메타버스의 세계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초현실 공간이다. 누구나 휴대폰으로 접속이 가능하므로 나의 전시는 항상 진행 중인 것이다.

-주변에서는 신 작가를 어떻게 평가하나.

△검정색, 파스텔 톤의 편안한 붓자국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직선으로 몰고 갔다가 부드러운 원으로 다독거리더니 종국에는 평정의 세계로 데려간다고 한다. 내가 이끄는 대로 시선을 맡기면 파도치던 마음이 가라앉는다고들 한다.

-그림을 배우려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지.

△담백한 것이 좋다. 음식도 옷도 사람도 삶도 그리고 그림도 단순한 게 좋다. 많이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면 어떨까.

-앞으로 계획이나 포부가 있다면.

△누군가가 행복 총량을 말했다. 늙고 가난하고 누추하고 병약한 이라도 행복이 있다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보다 약한 자를 가엾이 여기고 사랑으로 베푸는 중에 삶이 채워지고 따뜻해지고 여물어가는, 가녀린 가닥 가닥의 실들이 모여 질기고 강한 밧줄이 되듯 서로가 기대고 어울려 사는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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