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운암서원.

울진(蔚珍)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진짜 보배가 빽빽하게 많다는 뜻이다. 사람도 이름값 하듯이 울진은 흔히 3욕으로도 불릴 정도로 보배로운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태백산맥 큰 줄기의 우리나라 최고 질 좋은 금강송 군락지의 산림욕, 망양, 구산, 후포 등등의 해안을 끼고 있는 해수욕, 응봉산 깊은 산속에서 용솟음치는 백암온천과 덕구 온천욕이 그것이다.

운암서원은 구산해수욕장 가는 길옆으로 옮겨지었고 바닷가 구산에서는 울릉도로 떠나는 수토사들이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다리던 대풍헌이 옛 흔적을 남기고 있다.

#. 두 번이나 옮긴 소박한 운암서원

울진에는 옛 평해 기성지역에 서원이 집중되어 있다. 기성면 정명리에 평해 황씨 황응청과 황여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71년(현종 12년)에 지방 유림들의 뜻으로 명계서원을 세웠고, 노동서원도 기성면 황보리에 있는데 1816년(순조 16년)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사모하여 울진지역의 유림들이 노동서원을 세웠다. 두 서원 다 1868년(고종 5년)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었다가 명계서원은 1881년 강학소를 세웠으며 1983년에 복원하였고, 노동서원은 1913년 강학소와 영정을 봉안했다가 1921년에 중건하였다. 명계서원은 서원기능 중 반쪽인 선현봉사의 기능은 하고, 노동서원은 평해 구씨(丘氏) 재실로 사용한다. 중국 한나라 때 평해 황씨 시조되는 황락이 평해에 올 때 같이 온 구대림 장군이 평해 구씨 시조가 된다. 이 운곡 서원은 전국적인 스타서원이 아니고 울진이란 한적한 동해바닷가의 조그마한 서원에 불과하다. 건물도 초라하거니와 공간배치라도 잘 했으면 소박한 맛이라도 날 텐데 너무 공간이 협소하여 보기가 불편하다. 차라리 주차장을 옆으로 하고 마당 공간을 충분히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기는 백암 김제, 물제 손순효 두 분을 모셨는데 김제는 평해 군수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나라 잃은 관리로 망국의 한을 품고 시 한 수 남기고 동해(東海)로 행방을 감춘 고려의 충신으로 기우자 이행과 마찬가지로 불사이군의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이다.
 

구산항에 있는 울릉도·독도 모형.
구산항에 있는 울릉도·독도 모형.

물제(勿齊) 손순효는 성종 때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인 도승지를 지냈고 성리학과 문장이 뛰어났고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다 한다. 도승지를 연상하니 김대중 정부 때 동서화합의 상징으로 울진출신 김중권 비서실장이 생각난다.

이 운암서원은 1826년(순조 26년) 온정면 반암동에 세웠다가 1833년(순조 33년)에 온정면 노은동으로 옮겼다. 전국에 천여 개의 서원들이 온갖 민폐를 끼쳐 1868년(고종 5년)에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철폐할 때 운암서원도 철거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국 곳곳에 서원을 다시 세우는데 그때 이곳 구산리로 이전하여 세우면서 임진왜란 때 비안현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상주에서 순절한 백계 김희도 함께 배향했다.

이 운암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서원이 해단(海壇)이란 글씨의 건물이 있었다. 그것은 이 서원이 생기기 전인 1789년(정조 13년) 유림에서 제단을 만들어 김제 선생의 불사이군 충절을 기렸다가 서원으로 옮긴 것이다.
 

울릉도 떠났던 수토사들이 머물던 대풍헌.
울릉도 떠났던 수토사들이 머물던 대풍헌.

#. 울릉도 출발지 구산마을과 대풍헌

월송정에서 옛 길 따라 올라가면 길옆에 모래하천과 동해의 바닷물과 합수되어 물이 넘쳐 1603년(선조 36년)에 놓은 ‘평해 북천교비’가 세워져있고, 조금 위에는 운암서원이 초라하게 서있다. 곧이어 구산해수욕장이 나오고 해안으로 바짝 들어가면 포근하고 정겨운 구산마을이 나온다. 해안가에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의 바쁜 손놀림, 울릉도와 독도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고 옛 사람들이 타고 가던 수토선이 놓여있다. 길 건너 산언덕 아래로 가면 조선시대 울릉도에 벌목과 어로행위를 하는 일본인들을 토벌하고 육지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들어간 죄인들을 수토하기 위해 수토사 들이 바다가 잠잠하기를 기다리는 대풍헌(待風軒)이 세월의 흔적을 안고 서있다. 대풍헌은 원래 동민들이 사용하던 동사(洞舍)였기에 대풍헌과 기성구산동사 현판이 걸려있다. 그 앞에 ‘수토문화전시관’이 주인공 대풍헌 건물보다 크고 어리하게 지어 놓았지만 코로나에 문은 닫혀있다. 뒷산을 올랐다. 확 트인 바다 아마도 수토사들이 여기에 올라 바다의 기후를 살펴보고 울릉도로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도 각오해야 되기에 희생자가 많았을 것이다. 그 추모광장이 엄숙하게 놓여있다. 언제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써놓은 기록을 살펴보면 논농사도 지었고, 폭포와 산림 우거진 섬,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죽도(독도)도 묘사해 놓았다. 풍랑을 만나 4척 중 한 채는 수장된 1794년(정조 18년) 6월 3일 무오기록을 보면 숙연해지고 아찔하다. “항해 중 유시(酉時·오후 5~7시)에 갑자기 북풍이 일며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게 끼고, 우레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서 일시에 출발한 4척의 배가 뿔뿔이 흩어져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만호가 정신을 차려 군복을 입고 바다에 기원한 다음 많은 식량을 물에 뿌려 해신(海神)을 먹인 뒤에 격군들을 시켜 횃불을 들어 호응케 했더니, 두 척의 배는 횃불을 들어서 대답하고 한 척의 배는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 1882년 (고종 19년) 6월 5일 기미 기록은 “우리나라 사람 중에 호남인이 제일 많은데 전부 조선(造船)을 하거나 미역과 전복을 따며 그 밖의 타도 사람은 모두 약재 캐는 일을 위주로 하였다고 한다. 고종이 하교하기를 “이 내용을 총리대신(總理大臣)과 시임(時任) 재상들에게 이야기 하여 주어라. 지금 보니 한시라도 등한히 내버려둘 수 없고 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하였다고 전한다.

내려와 길 건너 수토선과 울릉도와 독도 모형을 한 번 더 살펴보고 아늑한 해안가 구산마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울릉도 떠났던 구산항.
울릉도 떠났던 구산항.

#.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사람들

지금이야 배로 2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섬이 많은 남해안과 달리 동해안은 섬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어 예전에 울릉도는 이어도 같이 상상의 섬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존재를 알았을까? 최초의 기록은 512년(지증왕 13년) 아슬라주(강릉)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여 “6월에 우산국이 신라에 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고려 때는 울릉도와 독도를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고 백성을 옮겨 살게 했다. 조선에 들어서는 백성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을 한다. 그래서 태종 때 두 번 (1403년, 1406년) 세종 때 세 번(1419년, 1425년, 1438년)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을 육지로 데리고 온다. 그중 태종 때 울릉 안무사 김인우는 거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해 출항하는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지며 갈수록 심해졌다. 지난 밤 꿈에 해신이 나타나 동남동녀 2명을 섬에 남겨놓고 가라 했는데 개의치 않고 출항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 둘을 섬에 내려놓으니 잔잔한 바다가 되어 무사히 왔다. 몇 년 뒤 궁금하여 섬에 남은 두 아이는 수색했더니 유숙했던 그곳에 둘이 껴안은 채 백골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 성하신당을 지어 매년 음력 3월 1일에 제사지내며 두 영혼을 위로해주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 하면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있다. 동래부의 노꾼 안용복(1658~?)은 왜관을 드나들며 일본어를 잘했다. 1693년 3월 울산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 고기 잡다 7척의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고 조선바다라고 호통쳤으나 오히려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해 가버렸다.
 

수토사들이 타고 갔던 수토선.
수토사들이 타고 갔던 수토선.

7개월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대담하고 논리적으로 호키 주 태수에게 강력히 항의하여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받아온다. 협상에 유리하도록 안용복은 높은 조선관리관복을 입고 1696년(숙종 23년) 5월에 가서 에도의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 받고 8월에 오자 조정(노론)에서는 나라의 허락 없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고 안용복을 사형시키라고 벌떼같이 일어난다. 결국( 소론, 서인) 신여철(1634~1701년)은 “용복이 한일은 말할 수 없이 놀랍기도 하지만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해내었으니 공로와 과오가 맞먹는다고 할 만합니다. 사형으로 논단할 수 없습니다” ‘구운몽’의 저자 소론 남구만(1629~1711년)도 “안용복을 죽임은 대마 도주만 기쁘게 할 뿐”이며 “사람됨이 걸출하고 영리하니 보통사람이 아니다. 마땅히 살려두어 뒷날에 쓰자”고 하여 죽음을 면하고 영동으로 귀양 간다. 그 뒤 행방은 알 수 없다. 국가가 관직을 주거나 시킨 것도 아닌데 일본을 두 번이나 가서 담판지은 뜨거운 용기와 실천력으로 우리 땅 이라는 것을 문서로 받아낸 엄청난 일을 한 대가는 귀양과 파멸이었다. 나이 40에….

또 성종 때 김한경은 왕명으로 삼봉도(울릉도, 독도)를 탐사하고 보고를 하였으나 바다에 무지했던 당시 관료들에 의해 허위보고 혐의로 처형당하고 딸 김귀진도 노비로 끌려간 비극도 통탄스런 아픔이다. “이 땅이 뉘 땅인데”외치며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 경비를 펼친 홍순칠(1929~1986년)같은 분들과 같이 국가보다 국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켰다. 그래서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년)은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바로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누대에 걸쳐 벌어진 분쟁을 종식 시켰으며…. 뛰어난 인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형을 운운하고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급급하였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했던 말이 아픔으로 마음을 때린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