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문화의 상징과 공간
(15) 신광

해월 선생 옛 집터 인근

“복술은 보잘 것 없는 무리이면서 감히 황당한 잡술을 품어 주문을 지어내고 요망한 말로 선동을 했다. 하늘을 위한다는 설로 비록 저 양학을 배척한다 하지마는 도리어 사학(邪學)을 본떴으며, 이른바 포덕문이라는 것은 겉으로 거짓을 꾸미고, 몰래 화를 일으킬 하는 마음을 기르고자 하는 것이다. 주문과 약, 그리고 칼춤은 평화시 난을 꾸미려 하고 은밀하게 당을 모으고자 하는 짓이다.”

<‘일성록(日省錄)’, 고종 1년(갑자(甲子), 1864. 2. 29.>

이 글은 ‘일성록’에 실려 있는 경상감사 서헌순이 올린 장계(狀啓)의 일부이다. 장계를 들은 대왕대비 조씨는 복술을 이단으로 지목하고 목을 매달아 죽이도록 한다. 글 속의 복술은 바로 수운 최제우이다. 수운은 동학을 창도한 인물이다. 동학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비변사등록’(제250책, 철종 14년 계해(癸亥) 12월 20일)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령으로부터 경주에 이르기까지 400여 리의 10여 주군(州郡)에서 동학의 이야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듣지 않음이 없고, 경주 주위의 여러 읍은 그 이야기들이 더욱 심하니, 주막의 부녀자들과 산골짜기의 아이들까지도 그 글을 전하여 읊지 아니함이 없다.”

이 글로 미루어 볼 때, 조령에서 경주까지 거의가 수운의 동학에 매료, 경도되었고, 특히 경주, 포항지역에는 주막의 부녀자에서부터 산골의 아이들까지 동학의 글을 읽고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동학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는 대단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道氣長存邪不入(도의 기운을 길이 보존한다면 사특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리니)

世間衆人不同歸(세간의 뭇사람과는 같이 돌아가지는 않겠다.)

- ‘입춘시’ “동경대전”

방황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기미년(1859) 10월 용담정으로 돌아온 수운이 쓴 첫 시이다. 수운의 용담정으로의 회귀는 조선사회의 현실적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던 15여 년의 방황의 세월에 대한 종지부였다. 용담정으로 돌아와서 쓴 ‘입춘시’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구이며, 대도를 이루어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에 동학을 창도한다. 해월 최시형이 수운을 만난 것은, 1861년(철종 12년) 6월, 해월의 나이 35세였다. 수운을 만난 처음에 해월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그의 글을 통해 더듬어 보자.
 

해월 최시형, 경주서 태어나 포항으로 이주
신광 기일·흥해 매곡·신광 마북 등 옮겨다녀
35세 때 수운 최제우와 만나 가르침 받고
동학 제2대 교주 올라 종교 체제 완성시켜
‘나는 누구인가?’ 존재의 의미 물음 던지며
차디찬 현실 속에서 인간다움 꿈꾸던 해월
그가 꿈꾸던 세상은 과연 이루어졌는가

“내가 젊었을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로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인 줄 알았다. 요순의 일을 행하고 공맹의 마음을 쓰면, 누가 요순이 아니며 누가 공맹이 아니겠는가.”

<‘독공(篤工)’, “해월신사법설”>

수운을 만난 순간이 해월에겐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꽉 닫혀있던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고, 막혀있던 갑갑증이 일시에 해소되는 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월의 이 말은 공자의 제자인 안연이 말한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舜何人 予何人]”라는 물음과 다름아니다. 안연의 물음은 “순이 사람이면 나도 사람이고, 순이 성인이 되었으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순이 자신의 안에 있는 마음을 깨쳐 성인의 경지로 나아갔다면, 나 또한 내 안의 참 나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깨쳐나간다면 성인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한마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신광에 세워진 해월 선생 어록비 뒷면
신광에 세워진 해월 선생 어록비 뒷면

해월은 이후 용담정으로 가서 수운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고, 8월 14일 동학의 도통을 승계하면서 동학의 2대 교주가 된다. 동학 하면 수운의 신이한 행적과 참형, 전봉준의 동학혁명, 그리고 3ㆍ1운동을 먼저 떠올린다. 특히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은 동학을 ‘혁명을 위한 도구’로서 ‘사회변혁을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수단’으로 이해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해월에게 와서 동학은 비로소 신비한 이적(異蹟)을 벗고, 공허한 사상의 날개도 벗고, 변혁을 위한 혁명주의적인 요소도 벗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마주하게 한다.

“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누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제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입니다.”하는지라, 내가 또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 짜는 것인가?”라고 물으니, 서군이 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어찌 서군뿐이겠는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대인접물(待人接物)’, “해월신사법설”>

중세, 사람에게 귀천이 있고 상하가 엄연히 존재하던 시대, 사람을 사고팔 수 있던 시대, 결혼의 과정에서 여성의 존재가 무의미했던 시대, 해월이 던지는 “그대의 며느리가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인가”라는 물음은 큰 울림을 준다. 계층과 계급이 사람을 사람 아니게 몰고 가던 때, 며느리를 한울님(하늘, 天)이라 천명하는 해월의 선언은 그래서 위대하다. 하지만 해월도 여기에 하나의 단서를 단다.

“내가 바로 한울(天)이요 한울이 바로 나니, 나와 한울은 바로 한 몸이다. 그러나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게 되므로 그 명(命)에서 어긋나고,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으므로 그 덕에 합한다. 그러므로 도를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이 전부 (나의) 기운과 마음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수도법(修道法)’, “해월신사법설”>

‘아시천천시아[我是天天是我]’이지만 나의 기운이 바르고, 나의 마음이 항상 바른 것을 행할 때 진정한 나가 되는 것이고, 이럴 때 한울님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해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에 대한 한결같은 생각은 주릴 때 밥 생각하듯이, 추울 때 옷 생각하듯이, 목마를 때 물 생각하듯이 해라. 부귀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권력 있는 자만 도를 닦겠는가, 유식한 자만 도를 닦겠는가, 비록 아무리 빈천한 사람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도를 닦을 수 있다.”

<‘독공’, “해월신사법설”>

해월 선생 옛 집터 가는 길
해월 선생 옛 집터 가는 길

도는 일상을 통해서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이 도인데, “이 나라는 도 닦는 것도 부귀한 자라야, 권력 있는 자라야, 유식한 자라야 할 수 있다니”. 곧, “바른 삶, 바른 행동, 바른 마음을 지니고 실천하는 데에도 귀천이 존재하다”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태생의 귀천이 아니고, 권력의 유무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 ‘진정성 있는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

순일한 것을 정성(誠)이라 이르고 쉬지 않는 것(無息)을 정성이라 이르나니, 이 순일하고 쉬지 않는 정성(誠)으로 천지와 더불어 법도를 같이하고 운을 같이하면, 가히 대성 대인이라고 이를 수 있다.

<‘성경신(誠敬信)’, “해월신사법설”>

해월에게 대성인, 대인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한결같이 순연한 마음을 견지하는 것, 오늘 하루가 아니라 매일, 또 매일 이러한 마음을 지니면서 법도대로 살아가면 성인이 되고 대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하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 기간은 3년여이다. 이후 40여년을 동학을 이끈 인물은 바로 해월이었다. 해월은 수운의 전기인 ‘도원서기’를 비롯해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과 수운의 노래인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실제 해월에 와서 동학은 교단과 교세, 교리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경주에서 태어난 해월은 15세 무렵에 포항으로 온 이후 신광과 흥해 등지에서 생활한다. 17세 무렵에는 신광면 기일(基日, 터일) 마을의 제지소에서 일하며 성장하였고, 19세에는 흥해 매곡에 사는 밀양 손씨와 결혼하면서 이곳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28세에 신광 마북(馬北)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곳에서 마을 이장 격인 ‘집강(執綱)’의 소임을 맡았다. 이후 33세에 다시 마을 안쪽의 검곡(금등골)으로 옮겨 갔다. 이곳에 머물 때 수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학교도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경주에서 포항 신광으로, 차디찬 현실이라는 땅을 디디고 살았지만 대동세상, 평등세상을 꿈꾼 해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있는 삶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우리의 눈높이로 끌어내리면서, 진정성 속에 빛나는 생의 의미들을 그려나간 해월.

해월이 걸어간 길 위에서 묻고 싶다. 해월이 꿈꾸던 세상은 이루어졌는가? 여전히 우리는 진정성이 결여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과 대화 속에서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기보다는 나와 너, 내외를 구분하면서 편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왜, 무엇이, 우리를 해월이 힘들게 걸어가야 했던 길에 여전히 머물도록 하는 것일까?

사진/안성용

글/신상구
위덕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양동문화연구소 소장, 포항문화재단 이사. 동국대 국문과에서 ‘수운 최제우의 성경론과 문학적 실현 양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 ‘치유의 숲’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