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
​​​​​​​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지난 여름 땡볕더위와 태풍에 지친 나뭇잎들이 쉴 곳을 찾아 거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걸 보노라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소슬바람에 코트 깃을 살짝 치켜세우고 사랑하는 연인과 팔짱을 끼고 고궁돌담길을 걸었으면 하는 기분이다. 말라비틀어져 가는 중년 사내의 심장 한 구석으로 촉촉한 물기가 스며든다. 왁자지껄하던 사회적 모임이 코로나로 잠시 정지되니 사람 만나는 일이 뜸하다. 의도하지 않게 사회분위기가 고독의 계절 가을에 어울리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뒤섞여 지낸 탓에 소홀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 느리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가을빛이 높은 요즘, 은근히 쓴 커피향이 제 몸뚱이에서 풍겼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고독을 좀 폼 나게 즐겨보고 싶어 집을 나선다. 고독을 즐기는 것은 아무래도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 잔을 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맞은편에 아리따운 여인이 앉아 조곤조곤 말상대를 해주는 것도 괜찮겠지만 고독한 분위기는 앞자리가 비어 있는 게 좋다. 평소 잘 들리던 커피전문점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출입문에 붙은 코로나 방역 경구가 눈에 확 들어온다. ‘마스크 미착용 출입불가’, ‘손 세척’,‘테이크아웃만 가능’ 등등. 고독한 분위기를 즐기려던 마음은 사치다. 죽음과 맞선 인간의 처절한 투쟁으로 여겨졌다면 너무 과한 생각인가?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탁자와 의자는 패잔병처럼 한쪽 구석에 쌓여있다. 객장 안에서 음료는 안 된다는 무언의 시위다.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냉큼 나가야겠다’고 느끼는 순간, 부동산 계약서 같은 종이뭉치가 들이닥친다. ‘발열여부, 출입시간, 이름, 전화번호, 개인정보동의….’ 횡으로 뻗어나가는 칸들이 죄수를 기다리는 독방 같다. 국가적인 재난상황에 대응하는 착한 시민의 책임을 다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꼼꼼히 적어나간다. 잘 적어나가던 펜이 ‘개인정보 동의’,‘개인정보 제3자에 제공 동의’란에 이르게 되니 주춤하게 된다. 개인정보가 볼모로 잡힌다. 코로나로 영업장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재하도록 행정명령이 발동된 것이다. 영업을 하는 곳에서 기록물을 잘 보관했다가 행정기관에 제출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혹시 원본은 제출하고 복사본을 업소에서 가지게 되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이르자 덜컹 걱정이 된다. 너무 무분별하게 개인정보가 나돌아 다니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엄격한 법이 정착되어 개인이든 기관이든 함부로 사용치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잊을 만하면 개인정보를 팔고 사는 사건이 생긴다. 사생활 보장은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세상이 디지털화되면서 사생활 노출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세상이다. 집을 나서면 하루 동안의 내 동선은 온통 폐쇄회로 천국에 갇힌다. 스마트폰은 실시간 위치추적기다. 신용카드는 내 생활패턴의 징표다. 오로지 무인도에서 고립된 자만이 사생활 비밀이 유지될까? 그도 드론의 고공접근을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수집된 방대한 데이터의 최종 보관자는 누구인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악령은 법과 도덕을 이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