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평생의 자산’이 될 기억을 만든 여행

가장 고생했던 날은 기억에 오래남고 생생하다. 시베리아의 추위가 얼마나 매서운지 몸으로 체험했던 날 찍었다.
가장 고생했던 날은 기억에 오래남고 생생하다. 시베리아의 추위가 얼마나 매서운지 몸으로 체험했던 날 찍었다.

◇ 18개국 38,000킬로미터를 달려 집으로

118일(2019년 5월 10일-8월 30일) 동안 38,000킬로미터를 달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체코-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벨기에-네덜란드-독일-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에스토니아(18개국)를 돌아 다시 러시아를 지나왔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딱히 일상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생업을 뒷전에 두고 다녀왔으니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고단하게 밥벌이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한 번도 떠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여행의 기억이 평생 자산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장엄한 시베리아와 북유럽의 자연 속을 마음껏 달린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다.

처음 세웠던 계획, 유럽의 서점과 도서관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오겠다는 다짐은 흐지부지 되었고 그야말로 주마간산 달리기만 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없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아내와 아이들이 여행을 끝낸 모습을 보고 했던 말은 “몇 개월 동안 10년은 늙은 것 같아!”였다. 4개월 동안 많은 에너지를 썼고 한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몸으로 밀어붙이는 건 더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고, 철없이 집을 떠나 길을 헤매는 일이 예전과 다르게 힘들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철없는 일에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행하는 동안 돌아가면 덜 소비하고 더 단순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것은 정리하고, 가진 것은 가능한 살려 쓰고, 능력 밖의 일은 쳐다보지 않고, 목적 없이 멀리 떠나지 않고, 사람 모으는 일에 힘쓰지 않고, 관심 없는 일에 허투루 에너지를 흩지 않고. 이번 여행에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내가 가진 에너지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단순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길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길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다.

◇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항로가 다시 열리길

여행을 다녀오고 1년이란 짧은 시간이 지난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한 이후부터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여행 하는 동안 거쳐 간 국가들 대부분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 받고 있고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다. 사람도 물류도 오가기 힘들어지니 점점 항로도 해로도 오가는 비행기와 배가 줄고 있다. 당장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던 페리도 운항을 멈추었다. 예정되어 있던 포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항로도 언제 열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여행, 항공, 해운 등 많은 분야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9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전쟁이 아닌 바이러스가 세상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러시아에서 만난 라이더 마르쫌의 우랄 바이크를 타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러시아에서 만난 라이더 마르쫌의 우랄 바이크를 타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지난해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오토바이 대륙 횡단 여행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내일도 예측하지 못하는 게 사람 일이라 마음먹은 것은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다. 마흔 이후의 삶은 상승의 변곡점을 찍고 내리막을 걷는 일만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뒤로 미뤄선 안 된다. 내일, 한 달 후, 내년에, 형편이 나아지면…. 하고 싶었던 일을 뒤로 미루면 결국 나중에 후회할 일만 남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일상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일도 가족도 잠시 놓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세상일은 모두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거둘 수가 없는 법이다.

대륙 횡단 여행, 오토바이 여행을 꿈꾸는 분들을 가끔 만난다. 딱 한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한다는 건 무리지만 여행하는 동안 절실히 느낀 건 ‘체력’이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중도포기하기 쉽다.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대사를 보고 무릎을 쳤었다. 사범이 바둑판을 앞에 두고 담담하게 주인공 장그래에게 말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야하는 여행에선 첫째도 둘째도 체력이다.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집중력만 잃지 않았다면 러시아를 벗어나며 미끄러졌던 사고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니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니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니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화창한 날 리투아니아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릴 때는 부러울 것이 없는 여행자였다.
화창한 날 리투아니아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릴 때는 부러울 것이 없는 여행자였다.

◇ 고마운 친구이자 독자였던 형주 씨를 기억하며

사십 대에 1년 동안 여행자로 살겠다는 버킷리스트는 이뤘으니 남은 3년 동안(난 마흔일곱이다) 오십 대에 해보고 싶은 것들에 대해 계획을 세워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다녀왔던 긴 여행 대부분 준비 기간이 3년이었다. 이번 여행도 경비를 마련하고 오토바이 정비하는 법을 배우고…. 준비하는데 3년이 걸렸다. 지천명이 되면 오토바이를 두고 자전거로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게 꿈이다. 자전거 여행에 대한 영감은 우랄 산맥을 넘다 만난 다이스케 씨에게 얻었다. 그는 3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여행했고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가 요트로 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길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모든 걸 갖추고 떠난 이가 없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고, 기회가 왔을 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을 뿐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책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여행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고,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나의 스승이었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 더는 여행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다녀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분들 중에 남형주 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형주 씨에 대해선 지난 1월 22일자 연재글에 동해항까지 마중 나온 일로 짧게 언급하기도 했다. 형주 씨를 처음 만난 건 2017년 여름이었고, 졸저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을 읽었다며 파주에서 찾아왔었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인연으로 성수공고에서 진행됐던 오토바이 정비 수업도 함께 듣고, 형주 씨가 운영하는 펜션에서 북토크도 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책방을 찾아 여행하는 이야기를 누가 재밌게 읽어줄까 했었는데, 형주 씨 한 사람 덕분에 그 걱정을 덜었었다. 이태준 선생은 “목전에는 독자가 적어도 좋다. 아니 한 사람도 없어도 슬플 것이 없다”고 썼지만 그건 거짓말에 가깝다. 읽는 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고단하고 슬픈 일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 끝 포르투갈 호카곶에 도착했던 날.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 끝 포르투갈 호카곶에 도착했던 날.

형주 씨는 내게 소중한 친구이자 독자였다. 여행기도 꼬박꼬박 읽고 있다며 연락했었다. 그런 형주 씨가 사고로 지난 5월 세상을 떠났다. 조만간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나겠다고, 지금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연락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었다. 형주 씨의 소식을 듣고 인생은 짧고 덧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떠났다 돌아오고 누군가에겐 꿈으로 남았을 뿐이다. 불공평한 일이다. 꿈이 있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길을 가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형주 씨를 떠올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7개월 동안 서른한 번의 소중한 지면을 내준 경북매일과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