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영덕 인량마을 갈암 이현일 종택

멀리서 본 인량2리 전통마을.
멀리서 본 인량2리 전통마을.

물은 이념을 초월하여 국경을 넘고 인위적인 행정구역을 무인지경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산이 막히면 돌고 돌아 산을 배려해주고, 절벽에 닿으면 몸으로 부딪치되 되돌아 나오는 수용과 공존을 반복하면서 유유히 흘러간다. 그래서 안동 임하댐으로 안동 지역만 수몰된 것이 아니라 이웃 청송 진보면 일부도 수몰된다. 갈암 이현일 종택도 청송 진보 광덕마을에서 영덕 창수면 인량마을로 1992년 옮겨 짓는다. 유서 깊은 종택을 옮길 때는 함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여건을 고려한다. 갈암이 인량마을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고 태실을 묻은 곳이라 태생적 인연이 되는 고향으로 옮겨온 것이다.

 

갈암의 12대 종부 김호진(73), 종손 이원흥(76)씨와 식혜, 다식.
갈암의 12대 종부 김호진(73), 종손 이원흥(76)씨와 식혜, 다식.

# 영해는 어떤 곳인가

지금은 행정구역이 나누어지고 한미한 읍으로 전락했지만 고려시대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로 조선시대까지 영해부로 이웃 청송 영양까지 도호부사가 관장하던 곳이다. 우리시대 영덕 하면 대게가 떠오르지만 영덕(영해도호부)은 넓은 벌판의 농산물과 풍부한 해산물이 경제적 기반으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라 정계의 실세들이 거쳐간 곳이다. 송나라 주희의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 영남학파의 종장 점필제 김종직이 영해부사를 거쳐 갔다.

물산이 풍부하다는 것은 좋은 면도 있지만, 수탈의 원인이 되어 탐관오리들은 중앙으로 진상하면서 자신도 치부하여 백성은 고달파진다, 영해부사 이정은 자신의 생일잔치에 초대해놓고 떡국 한 그릇에 30금을 받는 탐관의 소굴이었다.

우리 역사에 역성혁명이나 쿠데타는 위로부터의 권력싸움이라면 밑으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농민혁명(1894년)의 전초전이 영해서 일어난다. 이 지구상에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표방한 동학만큼 인간을 성스럽게 대한 것은 없을 것이다. 동학교도 이필제는 영해에 있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찾아와 최제우가 순교한 3월 10일(음력)을 기해 1871년(고종 8년) 교주 신원과 반봉건투쟁을 외치며 전국의 동학교도 600여 명이 영해부를 습격하여 부사 이정을 “…. 정사를 잘못하여 세상을 어지럽혔고,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한 죄.”를 꾸짖었지만 끝내 반성하지 않다가 목이 잘렸다. 관아의 돈 130냥을 영해읍내 5개동에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관의 보복은 가혹했다. 90명은 잡혀죽고 20명이 귀양 가고 60여 명이 수배 당했다. 이필제는 능지처참 당했고 부인과 가족, 친족 모두 죽였다. 이처럼 영해지방은 봉기 이후 대대적인 관의 탄압을 받지만 그들의 저항정신은 23년 뒤(19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고, 1896년 의병운동 때 태백산 호랑이로 통하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을 낳았고, 1919년 영해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갔다.

 

청백리 강파 권상임씨의 예쁜 종택.
청백리 강파 권상임씨의 예쁜 종택.

#. 유서 깊은 영덕 인량 전통테마마을

영덕 강구 지나 축산면을 들어서자 신돌석 장군이 생각나고, 수창면의 인량마을 동쪽의 괴시리 전통마을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었던 목은 이색이 태어났고, 인량마을은 고려 개혁정치의 상징 공민왕의 스승이었던 나옹 왕사와 퇴계 학맥을 이은 갈암 이현일 등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고을이다. 인량마을 입구에 들어가자 갑자기 불어오는 세찬바람에 익어가는 보리가 이리 저리 몸부림친다. 화가 이숙자의 보리밭 그림이 연상되면서 문둥(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닐니리…./ 나환자 이면서 인간적 고통의 고독을 노래한 슬픈 ‘보리피리’시가 떠올랐다. 인량 마을 중간에 체험학교에는 사람 하나 없는 마당에 당나귀 한 마리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체험장 좌,우로 인량2리 1리로 나누어진다. 1리에는 용암종택이 앞에 있고 오른쪽 뒤에 있는 삼백당은 영천이씨 농암 이현보(1467~1555)의 넷째아들로 강원도 관찰사 했던 이중량(1504~1582)종택이다. 넓은 공간에 큰 규모이고, 사람 없는 고택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안채 대문 구멍에 얼굴을 내밀고 길손을 빤히 보고 있다. 왼쪽 위에는 2층 누각의 평범한 처인당 고택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2리에는 마을도 넓고 고택들이 여기 저기 많이 몰려있다. 마을 중간에는 함양박씨 3형제(의연, 의열, 의훈)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슴 찡한 사적비가 마을의 긍지를 높인다. 조금 뒤에는 강파 권상임의 고택이 청백리다운 담백한 낭만이 흘러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는(儉而不陋 華而不侈) 말이 떠올라 내 마음도 즐겁다. 강파 고택 뒤에는 1450년대 지은 안동 권씨 부정공파 영해 입향조 오봉 권책의 종택인데 200여 년 뒤에 불타고 다시 지은 것이다. 좌측에 백산정은 우리 시대 정신은 사라지고 단가대로 업자가 지은 유치찬란한 한옥이라 눈과 마음이 괴롭다. 아마도 문중에서 돈 각출하여 지었을 것이다.

영해지역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는 만괴헌 신재수 고택에 들어서자 마음이 몹시도 아팠다. 잘 정리하면 매력적인 집인데 온갖 잡다한 물건들은 어지럽게 놓여있고 사랑채 겸 정자는 기둥도 기울어졌다. 아, 그때 안채에서 몸과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이 힘겹게 나오시길래 차마 눈을 마주치기가 송구하여 말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왔다. 제일 위에 자리 잡은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 이애의 충효당 종택은 인량 마을에서 전망은 가장 좋았다. 마침 서울 살다가 10년 전부터 충효당에 있다는 파종손은 “한 10년 사니까 전문 셰프 되었다.”며 맑게 웃는다. 나오면서 이름을 묻자 웃으면서 “몽룡입니다. 아니 이몽룡, 아직도 춘향이는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 바탕 웃으면서 나왔다.

 

갈암 종택의 장독대.
갈암 종택의 장독대.

#. 갈암 이현일과 종택

사람의 일생은 시대에 따라 좌우되고 집안의 환경은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고조부 이애는 영해로 장가들어 인량마을 입향조가 된 인연으로 갈암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명의 첫 부인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광산김씨 김해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이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한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 장계향이다. 장계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안동의 신사임당으로 칭송받는다. 여기서 난 갈암은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학문을 전수받아 퇴계학의 적통을 이어받는다. 산림처사로 학문에 매진하던 갈암은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까지 오른다. 갈암의 시대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인조때부터 숙종의 시기인데 숙종의 인현왕후(서인)와 장희빈(남인)의 붕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갑술옥사 때 68세의 나이에 홍원으로 귀양 간다. 조선시대 학문의 중심은 주자학이었다. 연구하는 입장에 따라 율곡 학통을 이어받은 기호학파는 김장생, 조헌,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진 서인이었다. 김종직→ 이언적→ 퇴계로 이어진 영남학파는→학봉→경당→갈암은 다시→대산→정재로 어어준 영남 남인의 종장이 된다.

갈암은 학문을 이룩한 경지도 크고 뚜렷하지만 필자가 주목하고 좋아하는 것은 호를 고상하지 않은 칡뿌리 갈(葛)자를 쓴 것과 해박한 역사지식에 자연과 벗하되 현실을 깊이 사유한 문장과 시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의 ‘수오재기’는 자신을 지키지 못한 회한을 가슴 뭉클한 반성의 문장이라면, 갈암 이현일의 ‘갈암기’도 자신을 갈고닦아 칡처럼 다양한 용도로 세상에 쓰임을 각오하는 훌륭한 문장이다. ‘갈암기’도 칡을 빗대어 자신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 칡이란 재질은 질기고 깨끗하며 마디는 길고 부드러워서 꼬아서 새끼를 만들 수도 있고 짜서 베를 만들 수도 있으며 두건을 만들기도 좋고 신발을 만들기도 좋으니…. 이제 내가 칡으로 만든 갈건으로 술을 거르고 칡으로 만든 신발로 서리를 밟으며 칡으로 만든 베를 몸에 걸침으로서 더위를 막고 칡으로 만든 줄로 지붕을 얽어맴으로써 비바람에 대비한다…. 이에 나의 사사로운 용도를 넉넉히 하고 나의 분수에 맡겨둘 뿐 남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으며 순진하고 소박한 천성을 지니고서 그럭저럭 자족한 삶을 살뿐이니 이러한 상태를 극도로 미루어 간다면 거의 갈천씨의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이름을 삼고 싶은 것으로는 그 의의가 칡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내가 이 때문에 다른 좋은 것들을 다 제쳐놓고 이 칡을 취하였던 것이다…”

 

잘 정돈된 우계고택.
잘 정돈된 우계고택.

인량마을 입구에는 무안박씨 영해파 입향조 청어당 종택이 애국지사 박주억 생가에 새로 지어 놓아졌고 옆 뒤에는 인량교회가, 조금 옆에는 청송 진보에서 옮겨온 갈암 종택에 화사한 꽃들이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 지어 놓은 솟을대문은 너무 높아 안채와 어울리지 않는다. 옮겨온 종택은 소박 단정한 지족의 선비 같았고, 잘 관리한 고택에 온갖 꽃들을 잘 가꾸어 놓아 자연을 좋아한 갈암 선생이 흡족해 할 것 같다. 정원 정리하고 있던 종부께 인사드리니 수줍은 미소로 “낫 들고 꼴이 말이 아닙니다.” 하시고 종손께 알리고 식혜와 다식을 내어 오신다. 12대 종손 이원흥님과 퇴계, 학봉과 서애, 호계서원, 병산서원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곡식이 농부의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다더만 집과 정원은 손 가는 만큼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마치 미인같이….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