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구미 해평 일선리 문화재마을

산 위에서 내려다본 일선리 문화재 마을.
산 위에서 내려다본 일선리 문화재 마을.

#. 구미 해평과 일선리 문화재마을 가는 길

안동 임하댐으로 수몰지역인 무실, 박곡, 용계, 한들 마을에서 70여 가구의 대규모로 옮겨온 일선리 마을을 입체적으로 보기 위해 군위군 소보면 시골 산길로 하여 해평으로 들어갔다. 해평(海平),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직역하면 바다 평야다. 내륙이지만 산을 등지고 흘러내리는 물은 습문천이 되어, 기름진 평야를 끼고 유유히 젖줄 되어 흘러가는 낙동강에 온몸을 맡긴다. 두 물줄기가 기름진 충적평야의 옥토를 만들어 주는 곳이라 이름에 걸맞다. 해평에서 일선리 문화재 마을에 가기 전에 길 좌, 우 야트막한 산(낙산고분군)에 가야 및 원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고분 205기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어 오래전부터 토착지배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라 최초로 눌지왕 2년(418년)에 아도화상이 세운 도리사가 있고, 통일신라시대의 낙산리 3층 석탑이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신라가 쇠약해지는 말기(907년)에 후삼국이 각축을 펼 때 견훤이 일선군과 남쪽 10여 성을 점령하여 후백제가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936년(고려 태조 19년) 왕건이 선산 알리천에서 최후의 승리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다. 이때 김선(金宣)은 왕건을 도와 큰 공을 세워 일선김씨를 하사받고 이 지역 대표적 가문이 된다.

해평면은 지금이야 구미국가공단으로 한적했던 구미에 편입되었지만, 고려시대부터 현으로 독립관청이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해평을 본으로 하는 성씨만 해도 해평 윤씨를 비롯하여 해평 김씨, 해평 손씨, 해평 유씨, 해평 길씨, 해평 전씨 등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낙산 고분군을 조금 더 가면 길옆에 가슴 찡한 의로운 개 무덤이 있다. 해평에 사는 하급관리였던 김성원(또는 노성원)은 출퇴근도 개와 같이하면서 아낌없이 보살펴 주었다. 어느 날 이웃동네에서 술이 잔뜩 취하여 집으로 오는 도중에 풀밭에 쓰러져 깊이 잠이 들었다. 불이나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강으로 달려가 몸을 적셔 풀밭을 뒹굴어 불길이 잡히자 기진맥진하여 주인 옆에 쓰러져 죽었다. 깨어난 주인은 자신을 위해 온몸으로 불 끄고 죽은 개에 감동을 받아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이와 같은 의로운 개 기록은 많고 임실의 오수에도 이와 비슷하다. 신라 때 김개인(金蓋仁)도 술 취해 잠들고 불이 나자 냇가에 달려가 물 묻힌 개가 방화선으로 불 끄고 죽는다. 이것은 고려 고종(1254년)때 문인 최자의 보한집에 실려 있고, 1973년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함부로 개 같은 놈 하면 안 된다. 개보다 못한 놈이 많다. 그 김개인은 죽은 개를 위한 슬픈 견분곡(犬墳曲)을 짓는다.
 

웃음 잃지않는 성자같은 우리시대 양반님 류남훈(79) 어르신.
웃음 잃지않는 성자같은 우리시대 양반님 류남훈(79) 어르신.

#. 안동에서 해평으로 옮겨온 일선리 문화재마을

1987년 임하댐으로 3개군 6개면 41개 동네가 사라졌다. 그중 박실, 무실, 한들, 용계마을 사람들이 고택 문화재와 함께 옮겨왔다. 70가구가 동시에 옮기려면 집터와 농지가 필수적인 조건이라 전주류씨 무실파 문중차원에서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 안동 남후면, 예천 신풍면, 상주 중동면, 구미(당시 선산) 해평면 후보지 중에 해평 낙산리(이주하고 일선리로 바꿈)를 선택했다. 안동과 멀었지만 농지와 집터 확보가 가능했고 학문을 좋아하는 류씨 문중은 이중환이 택리지에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嶺南人才在一善)”라고 하였듯이, 선산은 불사이군의 상징 야은 길재와 영남학파의 종장 김종직과 그의 아버지 김숙자. 의병장 허위 등 안동과 비견될만한 문향이 서려 있는 것에도 한몫했다. 집터 200평~5천10평은 추첨으로 분양받고 농사지을 논 12마지기(1천400평)를 각각 불하받아 조상대대로 살면서 정 들었던 고향을 떠나 낯설은 구미 해평 낙산리에 정착하여 오늘의 일선리 문화재마을을 이루었다.

일선리 문화재마을에 들어섰다. 필자는 예전에 이 마을에 와서 바둑판같이 구획해놓아 군 막사나 관공서 관사 같아 실망하고 아쉬웠지만, 다만 옮겨놓은 고택들 하나하나는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관광차 밀려오던 일선리 휴게소는 썰렁하고 그 옆에는 매매를 내놓아 마을의 쇠락을 알린다. 버스 기다리는 할머니 한 분과 잠시 대화했다. 마을이 수몰될 때 있는 사람들은 대구나 도시로 나가고 보상 없이 아무것도 없이 온 사람들이 다 부자 되었단다.
 

잘 꾸며놓은 망천동 임당댁.
잘 꾸며놓은 망천동 임당댁.

젊은이는 나가고 한 사람도 없고 70살 지난 사람이 가장 젊단다. 집터와 농지를 불하받을 때 집터는 1평 6천500원, 논은 1평 3천500원이었는데 있는 사람들은 맞돈(현금의 경상도말)주고 샀고, 없는 사람들은 20~30년 연부로 하여 이제는 전부 다 갚았고, 모두다 부자 되었다고 한 번 더 힘주어 강조하신다. 여기가 안동보다 교통 좋고 병원 가깝고 여건이 좋다 하시면서 79살 나이만 알려주고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고 버스에 오르신다.

마을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 뒷산을 오르다 마침 약통 메고 밭일하러 오는 어르신을 만나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금 일선리 마을은 산을 깎아 터를 만들고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논을 분양했단다. 집터 분양가는 6천원 조금 더했는데 융자는 8~9천원이었다. 전주 류씨 무실파의 70가구에 안동 권씨, 진성이씨, 의성김씨 타성 몇 가구가 왔고, 있는 사람들은 안동으로 제일 많이 나가고 대구에도 많이 갔다 하신다. 고향 생각 나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하룻밤 자고 나면 생각나 1년에 서너 번은 안동 갔는데 차차 고향 생각이 멀어지고, 10년 지나서는 긴요한 일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33년 지난 지금은 어떠십니까? “생각이야 간혹 나지만 모든 여건과 농사짓기가 안동보다 좋고, 여기 선산사람들은 우리를‘안동 산중 사람’이라고 놀려도 우리를 양반대접 해줘서 고맙다”하신다. 그 대신 밭이 귀해 산비탈 쪼아서 조금 하고 이 뒷산도 국유지였는데 군수에게 부탁하여 문중에서 산 것이라 했다. 아들딸 4남매 객지에 나가고 아내와 행복하게 농사일 하며 사시는 모습 보니 성자 같아 보였고, 대화 내내 웃음 머금은 온화한 미소는 진정 아름다운 이 시대 양반을 뵌 것 같아 겸손해지고 마음이 행복했다. 그리고 바로 앞에 흉물처럼 짓다 만 현대식 건물을 물어보았다. “짓다가 부도가 났고, 좀 옳찮은 사람인데, 사기가 농후한 사람입니다.”안동 앙반 다운 말씀이었다.

 

단단하게 잘 지은 수남위 종택의 사랑채.
단단하게 잘 지은 수남위 종택의 사랑채.

#. 내려다본 구미와 일선리 고택들

드론 없이 내려다본 사진 찍으려면 발품을 팔아 산 위를 올라야 된다. 신록의 좁은 산 오솔길은 정겨웠지만 한참을 올라야 했다. 이윽고 경주 남산모양으로 큰 바위 여러 개가 집단으로 엉켜있어 기뻤다. 여러 바위 덩어리 중 평평한 큰 바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듯 반가웠고 고마웠다. 아래를 내려다본 풍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왼쪽 저 멀리는 구미 금오산이 옹골차게 중심을 잡아준다. 오른쪽은 선산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 평화로움을 맡긴다. 발아래 일선리 마을이 질서 정연하게 있고, 왼편에는 해평 들판의 옥토가 풍요롭게 누워있는 기막힌 장면을 연출한다. 갈 길 바쁜 나그네는 배고픔도 잊은 채 한참을 서성거리다 내려와 옮겨온 고택들을 둘러보았다. 고택 하나하나 다양하여 온갖 사연과 애환이 있겠지만 전주 류씨 무실파 고택들 특징은 외유내강의 선비 같은 맛이나 화려하거나 큰 건물 보다 단단하고 내실있고 담백한 맛이 나 정겨웠다.

경사진 마을의 제일 위에는 옮겨온 고택들인데 서로 형제같이 붙어 있다. 우측 위에 동암정은 정면 3칸 원기둥의 단단한 아름다움의 정자였다. 길 건너 용와 고택은 박곡에서 옮겨왔는데 찬찬히 눈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침간정은 건실하게 폐쇄형의 실용적으로 지어 정자 맛은 없었고, 안채는 정면 6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었다. 제일 중심에 있고 큰 수남위 종택은 임진왜란 전에 지은 건물로 힘과 균형이 어우러진 잘 지은 집이라 박곡의 종택다운 위엄이 있었다.
 

검소한 난간의 아름다운 대야정 정자.
검소한 난간의 아름다운 대야정 정자.

옆에 호고와 정자도 멋 부린 단단한 기교가 넘친다. 임하댁은 높은 단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건물인데 비교적 오래된 고택이 아니기에 크게 권위적으로 지었다. 그러나 집의 짜임새는 알맞게 배치했다. 그 위의 대야정 정자는 난간도 하여 담담한 멋을 부린 아름다운 정자였다.

바둑판 같게만 구획하지 않고 자연스런 골목을 만들었다면 아름다운 고택마을이었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보는 사람은 객이고 사는 사람들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니 성공한 이주마을이었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