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를 따라 ‘나의 국토’를 걷는 즐거움
동해를 따라 ‘나의 국토’를 걷는 즐거움
  • 홍성식기자
  • 등록일 2020.01.09 18:39
  • 게재일 2020.0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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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해와 조태일 시인

짙푸른 동해는 아기자기한 남해, 먹을거리 넘치는 서해와는 전혀 다른 매력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짙푸른 동해는 아기자기한 남해, 먹을거리 넘치는 서해와는 전혀 다른 매력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사실에 근거한 빤한 이야기다. 그러나, 바다 곁에 산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낭만적인 일. 그래서다. 이 땅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바다’와 관련된 추억 하나쯤 없을 수가 없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

10대 후반엔 남쪽 바닷가에서 서툰 연애를 하기 바빴다. 거제와 남해, 해운대 해수욕장과 광안리 해수욕장을 시간이 날 때마다 갔었고, 또래 여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준다는 핑계를 대며 해변에서 아주 멀리 튜브를 밀어버리곤 했다. 겁을 먹은 걔들이 안겨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20대엔 다니던 학교와 지척인 서해를 자주 찾았다. 갯벌이 끝도 없이 펼쳐진 그 바다엔 조개와 낙지, 새우와 젓갈 등이 넘쳐났고 그것들을 안주 삼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다소 거칠게 보이더라도 20세기 후반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겐 그런 게 보편이었다.

전라북도 부안에 자리한 변산반도. 바닷가를 걷다보면 ‘채석강’이라 이름 붙인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1990년대 초반엔 “연인이 채석강엘 함께 가면 한 달 안에 헤어지게 된다”는 끔찍한(?) 풍문이 돌았다.

그럼에도 일부러 여자 친구의 손목을 끌고 거길 가기도 했다. ‘세상 무엇도 견고한 우리 사랑을 깨뜨릴 수 없다’는 걸 증명하려고. 무모했기에 아름다웠던 시절.

더 나이가 들어서는 해가 뜨는 동쪽 바닷가를 좋아하게 됐다. 동해는 원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공간이다.

무섭도록 짙푸른 물빛이 그렇고, 세상을 삼킬 듯 몰아치는 높은 파도가 그렇고, 망망대해 속 섬이 드문 막막한 풍경이 주는 쓸쓸함이 그렇다.

아기자기 조그만 섬들이 수백 개 떠있는 남해도 물론 아름답고,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널린 서해의 풍요로움도 재론의 여지없이 근사하다. 하지만 사람마다 ‘취향’이 있는 법. 기자의 취향엔 남해나 서해보다 동해가 맞춤했다.

 

국토서시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동해의 마을마다에서 떠올린 ‘뜨거운 시’ 한 편



마흔 살이 넘어서면서 울진과 영덕, 포항과 경주를 찾는 일이 잦았다. 경상북도에 접한 동해는 똑같은 이 나라 동쪽이면서도 강원도 바다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지구 위에서 바다 물빛이 가장 아름답다”는 지중해와 아드리아해, 안다만 등을 빼놓지 않고 가봤다. 그러나 몰랐다. 그것보다 훨씬 가까이에 더 아름다운 빛깔의 바다가 있다는 걸.

동해안 작은 마을을 꿈결인 듯 산책하면서 소년 시절을 떠올리는 건 ‘한국사람’만의 특별한 권리였음을 늦게 깨달았다.

그때 동시에 눈앞을 지나가는 시 한 편이 있었으니 바로 조태일(1941~199)의 ‘국토서시(國土序詩)’였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인 1975년, ‘바다에서의 낭만을 꿈꾸지 못했던 불행한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됐던.

 

수많은 사람들이 푸른 동쪽 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기다리고 있는 2020년 벽두 풍경.
수많은 사람들이 푸른 동쪽 바다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기다리고 있는 2020년 벽두 풍경.


▲‘불의의 시대’를 의롭게 살아냈던 시인 조태일



수줍게 고백하자면 기자는 조태일에게 ‘인간답게 사는 길’과 ‘부끄럽지 않은 시를 만드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딱 30년의 나이 차이.

조태일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낭만과 서정보다 고통과 분노의 노래가 아름다운 시절을 살아야했다. 당시는 행복한 시인보다 불행한 시인이 많았던 시대였다.

1941년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조태일은 고등학교 시절 일찌감치 신춘문예에 당선돼 시인이 됐고, 이후 1999년 타계할 때까지 초지일관 시와 조국만을 사랑한 장부였다.

올망졸망한 20세기 한국 시인들 사이에서 육척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제 마음 가는대로 소리쳤던 겁 없는 문인.

1974년 고은(시인), 염무웅(문학평론가), 황석영(소설가) 등과 함께 해방 이후 최초의 진보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설을 주도했고,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국토’ ‘가거도’ ‘자유가 시인더러’라는 판매금지 시집을 줄줄이 내놓았다. 스스로를 버리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긴급조치 9호 위반, 5.17계엄법 위반 등으로 여러 차례 구속됐지만, 결코 자신이 쓰는 시의 방향을 함부로 바꾼 적 없는 조태일.

그 시절, 시인 신경림은 “억눌려 살아온 사람들의 모인 힘, 짓밟히고 살아온 대중의 지혜를 찾아 빛나는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말로 조 시인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조태일의 문학이 ‘저항과 반역’의 길만을 걸었던 건 아니다.

살아생전 그는 누구보다 정 많은 의리의 사나이였다. 감옥에 갇힌 후배의 집에 찾아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겨울을 보낼 쌀과 연탄을 가져다주고 말없이 사라지던 따뜻한 아저씨였고, 아들 또래의 제자들에게 손수 밥상을 차려주던 격의 없는 스승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조태일을 지목해 “그의 시는 남성적이면서도 불필요한 것을 모두 걸러낸 과부족 없는 압축과 절제와 여백의 미학을 보여준다”고 상찬했다. 조태일은 시보다 삶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제 스승은 없더라도... 홀로 동해를 다시 걷는 2020년



‘국토서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이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가파른 시대. 조태일은 거칠게 갈라진 ‘발바닥이 다 닳도록’ 가녀린 ‘숨결이 모두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의 삶이 불처럼 뜨겁게 타오르기를 원했다. 동해의 차가운 파도를 뚫고 솟아오르는 해처럼.

더불어 그는 커다란 덩치와는 무관하게 작고 사소한 것들을 누구보다 아꼈다. 아래와 같은 문장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조태일이 세상을 떠난 게 벌써 20년 전이다. 기자는 그를 잘 안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젊은 시절 그랬던 것처럼 경상북도에서 강원도까지, 푸른 물결을 친구 삼아 동해로 뻗은 길을 성큼성큼 열두 번 걸었을 사람이다. 조태일 시인은.

이제 스승은 사라지고, 머리칼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제자만 남았다. 올해는 홀로 동해를 걸어볼 요량이다. 조태일이 들려준 아래와 같은 잊을 수 없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시간을 잊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안 있으면 무슨 무슨 세기는 가고 무슨 무슨 세기가 닥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시대라는 것이, 세기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시간은 순간순간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닌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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