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숲에서
초겨울 숲에서
  • 등록일 2019.12.12 18:40
  • 게재일 201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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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야산을 밀어 만든 아파트 단지에 아담한 공원이 있다. 새로 나무를 심어서 조성한 공원이 아니라 원래의 산 일부를 그대로 보존한 공원이다. 키 큰 교목들로는 소나무도 더러 있지만 참나무들이 대부분이어서 여름에는 그늘이 좋고 가을에는 단풍과 낙엽이 좋다. 참나무도 종류가 다양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밤나무를 비롯해서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가 대부분이다. 잎이나 도토리의 모양과 크기, 나무껍질의 모양으로 구별을 하는데 이 공원에는 상수리나무가 주종이고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도 더러 보인다.

큰 나무 밑에는 어린 참나무들과 싸리, 개옻나무, 아카시아, 청미래, 인동덩굴, 찔레, 억새 등이 덤불을 이루고 있다. 산책로 오솔길 가에는 풀을 벤 자리에 파랗게 새로 자란 풀과 뒤늦게 꽃을 피운 쑥부쟁이가 추위에 떨고 있다. 얼핏 보아서는 어지럽게 무질서한 풍경 같지만 인위적으로 가꾸고 다듬은 공원보다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 든다. 고층아파트 단지 안에 이렇게 자연생태계를 그대로 유지한 공원이 있다는 건 여간 흐뭇한 일이 아니다.

초겨울의 숲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바싹 마른 잎을 달고 있는 참나무들이다. 키 큰 나무들은 거의 다 낙엽이 졌는데, 어린나무들은 대부분 마른 잎을 그대로 달고 있다. 상록수가 아닌 활엽수들이 마른 잎을 단 채로 월동을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산책로 가의 벤치에 앉아 그 까닭을 생각해보다가 문득 ‘바스락거리기 위해서’라는 답을 떠올린다. 아직 어린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로 삭풍의 겨울을 견딘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혹독할 것 같다. 사람들도 몸살이 나서 삭신이 쑤시고 아플 때 신음소리라도 내면 견디기가 조금은 나은 것처럼 채찍으로 감기는 매운바람 앞에서 바스락 소리라도 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스스로 대견할 정도로 그럴싸한 추측인 것 같다.

다분히 감성적인 상상을 하며 숲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보다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관목들과 덩굴들이 뒤엉킨 덤불숲 밑에는 마른 나뭇잎을 바람막이로 월동하는 풀뿌리나 벌레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후자가 더 당위성을 갖는 결론일 것 같지만, 전자를 아주 버릴 생각은 없다. 세상의 이치란 그렇게 사실적인 당위로만 따질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바람막이가 되기보다는 바스락거리기 위해서 마른 잎은 달고 있다는 것이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결론일지도 모른다. 초겨울 숲에서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상념에나 빠져 있는 것도 한갓 부질없는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또 한 해가 저물도록 대한민국의 정세는 시끄럽고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거짓과 위선과 탐욕과 망집으로 얼크러진 실타래를 쾌도난마 할 묘책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천심이라는 민심도 떨어져 뒹구는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던가. 이 나라의 권력자와 위정자들을 모두 겨울 숲으로 데리고 가서 온종일 찬바람에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듣게 하면 어떨까. 미세먼지처럼 자욱한 인간사의 소음 너머로 무엇이 참인지 보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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