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1998년 봄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김대중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과 김우중은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김우중은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경제수석의 답은 “이제 시장경제 중심으로 하니 안됩니다”였다. 그러자 김우중은 그러면 시장경제 하는데 청와대 경제수석이고 비서관이고 필요없겠네”라고 반발했다. 그걸로 김우중의 운명은 나락의 길로 걸었다.

초겨울의 한파속에 대우그룹의 신화를 쓴 김우중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대우그룹의 전성시절 힘을 기울여 세웠던 아주대학교의 병원에서 오랜 투병을 하다가 홀연히 떠났다. 그의 빈소에는 정계, 재계의 많은 인사들이 찾았다. 한국 경제의 큰 축이었던 대우를 이끌었던 김우중의 떠남은 그렇게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한국경제발전의 아이콘인 그는 떠났다. 그는 1989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썼다. 그 책의 말처럼 그는 세계방방곡곡을 누비면서 한국을 알렸다. 대우는 한국 산업의 세계경영의 첨병이었다. 김 회장은 바둑 실력이 꽤 좋은데도 가끔씩 너무 호방한 수를 두다가 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는 꿈과 포부가 너무 큰 나머지 현실적인 수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그의 일생의 행보와 맥을 같이 하는 듯하다.

1936년 대구 출생인 김우중 회장은 경기고와 연세대 상대를 졸업한 후 만 30세인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세계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을 확장해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 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로 일군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이다.

그러나 1998년 IMF 이후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대우는 해체되었다.

그가 한국발전에 끼친 경제적인 공헌은 후세의 평가에 맡기기로 하자. 그가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후세에 맡기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세계경영’이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심어준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대우의 그림자가 있고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그가 세계경영과 함께 1977년 그의 사재를 털어 인수하여 키운 아주대는 그의 교육의 세계경영의 일환이었다. 아주대는 공과대를 필두로 한국 사학의 한 축으로 한국 고등교육에 공헌해 왔다. 무엇보다 그의 교육에 대한 투자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아덴만의 영웅’으로 알려진 아주대 이국종 교수는 대한민국의 복합중증외상치료를 이끌고 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도전하고 이를 통해 인생과 진로에 대한 자신감을 얻도록 하는 아주대의 파란학기제는 새로운 시도로 교육부의 인정을 받으며 큰 주목을 끌고 있다. 포스코의 박태준 회장이 포스텍을 세워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면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아주대를 세워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였다. 먼훗날 두 회장은 기업인에 앞서 한국의 교육현장을 이끈 위인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김우중 회장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