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금주령(禁酒令)으로 유배를 온 윤면동(尹冕東)

충청병마절도사 윤구연의 공덕비. 그는 금주령을 위반하여 참수형을 당했지만 1757년 음력 12월에 세운 공덕비가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 있다.

조선시대 왕들은 통치의 수단으로 금주령(禁酒令)을 곧잘 내렸다. 특히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는 더욱 그랬다.

태종은 집권 초기부터 빈번하게 금주령을 내렸는데,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스무 차례가 넘는다. 세종은 재난이나 이변이 없더라도 매번 농사철에는 술을 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영조는 재위 기간 52년 중 50년 동안 금주령을 내려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금주령을 시행한 임금으로 꼽히고 있다.

1764년(영조 40) 음력 5월, 전라도 영광군수로 있던 윤면동(尹冕東)이란 사람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관내 사람들 중에서 금주령을 위반한 사람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윤면동이란 어떤 사람일까? 공교롭게도 그와 가장 악연인 사람의 기록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원교 이광사가 쓴 <원교집선(圓嶠集選)>에 의하면, 원교는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때로는 학동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비교적 안정적인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데, 1762년(영조 38년)에 들어와 갑자기 진도에 이배된 뒤 다시 신지도로 옮기게 된다. 그 이유가 바로 윤면동이 올린 장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윤면동은 임금에게 ‘원교가 북쪽 변방에서 선비들을 다수 모아 글씨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민심을 선동할 우려가 있으니 작은 섬에 이배하라’고 요구를 했다. 이 상소에 의해 섬으로 옮겨진 원교는 신지도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그런 윤면동이 이번에는 자신이 서해극변에서 동쪽 끝 연변(沿邊) 장기현으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된 것이다.

농경이 기본인 조선사회에서 술을 마구 빚어내는 일은 큰 문젯거리였다. 술을 빚으면 열 사람이 먹을 곡식을 한 사람이 마셔 없앤다. 1733년(영조 9) 1월 10일, 도성(都城)의 쌀값이 뛰면서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비변사의 당상관 김동필(金東弼)이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시기가 바로 세초(歲初)라 집집마다 삼해주(三亥酒)를 빚고 있었다. 삼강(三江)에 정박하고 있으면서 미곡을 파는 미선(米船)들이 모두 술을 많이 빚는 가정으로 미곡을 매도하고 있었기에 시중에 나돌 쌀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임금에게 금주령을 엄격히 내리자고 건의를 했고, 영조는 이를 받아들여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 백성과 관리들을 단속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금주령은 지방에서는 비교적 엄격하게 준행되었으나, 한양의 사대부·관료사회에서 이 같은 명령은 번번이 지켜지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굶어서 죽어나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술을 빚어 알곡을 탕진하는 일이 여전히 계속된 것이다. 환자가 약재를 넣은 청주를 마시는 것은 허용되었으므로 특권층들은 쌀로 청주를 빚어 약으로 쓰는 술, 곧 ‘약주’라고 속이고 먹었으므로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

1755년(영조 31) 여름에는 장맛비가 한 달 동안 이어지더니 큰 홍수가 났다.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심한 흉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관아의 벼슬아치와 양반 지주들은 음주가무에 태평세월을 보냈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지방에 국한해 금주령을 내렸지만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해 9월, 이를 보다 못한 영조가 직접 나서서 온 나라에 금주령을 내리고 스스로 궁궐 안에 두었던 술을 모두 없앴다. 제사와 나라의 잔치 때도 감주만 쓰도록 했다. 대사헌 구상(具庠)이 “제발 제사 때 탁주라도 쓰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오히려 금주령을 위반한 자는 중죄로 다스린다고 공표했다.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3개월의 유예기간 후 1756년(영조 32) 정월부터 전국에 금주령이 시행되었다. 이는 조선 전 시대를 걸쳐 가장 엄격한 것이었다.

 

대쾌도(大快圖).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그림 속에는 술에 만취한 한 양반을 세 양반이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갓이 벗겨진 채 버티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익살스럽기 그지없다.
대쾌도(大快圖).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그림 속에는 술에 만취한 한 양반을 세 양반이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갓이 벗겨진 채 버티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익살스럽기 그지없다.

1758년(영조 34)에도 큰 흉작이 들었다. 영조는 홍화문(弘化門·창경궁 정문)에 나가 백성들에게 금주윤음(禁酒綸音·금주에 대해 왕이 특별히 내리는 문서)을 또 발표했다. 이번에는 만약 위반자가 있을 시는 효수(梟首)하겠다고 했다. 이때의 금주령은 이미 흉년의 곡식절약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귀중한 곡식을 술을 빚는 데 낭비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술에 취한 관리들이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경계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서슬 퍼런 분위기에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었다. 1762년 9월, 남병사(함경도 북청의 병마절도사를 말함) 윤구연(尹九淵)이 매일같이 술을 마셔 취해있다는 대사헌 남태회의 상소가 올라왔다. 영조는 상소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라는 비답을 내렸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선전관 조성(趙峸)이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를 발견하고 영조에게 아뢰자, 영조는 당장 그를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그해 9월 17일, 영조는 남대문으로 가서 잡혀온 윤구연을 친국을 했다. 그의 옆에는 술 냄새가 솔솔 나는 빈 항아리와 약간의 누룩이 증거물로 놓여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윤구언은 실수를 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으나, 영조는 도성의 백성과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이날 영의정 신만·좌의정 홍봉한·우의정 윤동도가 차자(箚子·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윤구연의 죄에 대해 용서할 것을 드세게 주장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고 말았다.

비참하게 죽은 윤구연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려 남대문에 걸렸지만, 술 항아리가 금주령이 내려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억울했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회자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구연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 우수군절도사 등 여러 무관직을 역임했다. 1751년(영조 27) 8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제주목사 재임 중에는 각 관청의 관리를 철저히 단속해 업무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해 요역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제주 오등동 한천(漢川) 상류에 위치한 방선문(訪仙門) 계곡의 바위 절벽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磨崖銘)이 아직도 남아 있다. 또 1757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시절에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청주시 상당구에 그를 잊지 않으려는 불망비가 아직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적어도 술이나 퍼마시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 나태한 관리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영조가 1774년(영조 50)에 들어서 이미 죽고 없는 윤구연에게 다시 직첩(職牒)을 지급하라는 명을 내린 것만 봐도 그렇다.

1763년 (영조 39) 6월 20일, 이번에는 포도대장 정여직(鄭汝稷)이 잡혀왔다. 야경을 준비하던 어영청 소속 순라군들이 금령을 어기고 술을 마시다가 암행어사에게 적발된 것이다. 영조는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장안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책임자인 그를 남양(南陽·전라남도 고흥)으로 귀양 보냈다. 곧이어 병조 판서로 하여금 노량진에 가서 중군(中軍·부대장을 호위하며 실질적인 임무를 관장하던 관리)에게 곤장 열 대를 때린 뒤에 파면토록 하고, 패장(牌將· 군졸을 거느리던 사람) 또한 곤장으로 다스린 후 충군(充軍· 계급을 강등하여 수군이나 변방으로 보내던 군역)하도록 명했다.

이날 영조는 연석해 있던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으로부터 해괴한 보고를 받는다. 전 장성 부사(長城府使) 최홍보(崔弘輔)의 기생첩이 금주령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가관인 것은 이를 안 최홍보의 부관(部官)이 그녀에게 태형(笞刑)을 가하자 그 기첩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홑이불을 덮어쓰고 도랑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화가 난 영조는 이 사실을 숨기고 아뢰지 않은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사대부 중 기첩을 데리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원래 기생의 적(籍)으로 되돌리고, 그 숫자를 왕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 조선 후기 영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금주령(禁酒令)이 잘 시행되지 않는 것을 개탄하며 백성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내린 조칙을 간행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 조선 후기 영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금주령(禁酒令)이 잘 시행되지 않는 것을 개탄하며 백성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내린 조칙을 간행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 일이 있고 나서도 금주령 위반자는 계속해서 나왔다. 영조는 삼남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금주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곳의 지방관을 색출하라고 명령하였다. 암행어사들은 충청의 강경 쪽에서 술이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포착하였다. 1764년(영조 40) 5월, 드디어 양천(陽川)에서 술을 빚은 사람이 강화도의 선상(船商)에게 팔다가 적발되었다. 일당들이 모두 포청(捕廳)으로 잡혀왔다. 그달 3일, 영조는 강화도관할 책임자인 강화유수 정실(鄭宲)을 파직시켰다. 술을 생산한 곳의 지방관 양천현감 박명양(朴鳴陽)도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귀양 보내고 이 두 고을을 감독했던 전 관찰사 남태제(南泰齊)를 양재역(良才驛)에 귀양을 보냈다. 음주를 위반한 백성 네 사람은 형조에 명하여 칼을 씌워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게 했다.

이때 단속된 사람들 중에는 전라도 영광군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물건을 배에 싣고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경강(京江·뚝섬으로부터 양화도에 이르는 한강의 일대)에서 술을 취급하다가 순라군에게 적발되었던 것이다. 그 책임을 지고 해당 고을의 군수인 윤면동이 1764년(영조 40) 5월 4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영조의 금주령은 과격하고도 잔인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영조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다만 금주령을 범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싶었든지 마신 술의 다과(多寡)로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단속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뿐이라는 비판이 계속되었고, 심지어 영조가 남몰래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돌았다. 검토관 조명겸(趙明謙)이 영조에게 음주를 경계할 것을 권하자 영조는 “내가 마시는 것은 소주가 아닌 오미자차”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왕실과 관료층이 금령을 지키지 않게 되자 실행 실무부서인 사헌부 관원 전원이 그 책임을 지고 사직을 청하는 사태도 있었다. 지배층 스스로가 금령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민간에만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조의 금주령은 정조 때에 와서야 비로소 해제되었다. 정조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해 신하들이 만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애주가 임금 덕분인지 정조 때에는 주막 문화가 발달했다. 밤이 새도록 술을 파는 날밤집, ‘목로’라는 나무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선술집, 안주인은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팔뚝만 내밀어 술과 안주를 내준다는 팔뚝집 등은 모두 정조 이후에 등장한 술집의 형태였다.

요즘 들어 자동차의 음주운전이 큰 사회적 문제로 다가 온다. 조선조 금주령이 춘궁기의 곡식저축과 더불어 예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음주단속은 음주 운전자에 대한 처벌과 계도가 주목적인 것이다. 음주단속의 목적과 명분은 달라졌지만, 나라와 술꾼간의 음주전쟁은 지금도 끝나지가 않았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