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선의 불법조업, 조선시대 때도

긴 세월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중국어선의 불법조업’ 이야기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억울하지만 해결방법도 없다.

오징어가 사라졌다. 수온, 조류의 변화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결국 중국어선 때문이다. 명태가 사라졌다. 마찬가지다. 중국어선 때문이다. 서해안의 불법조업과 동해안 불법조업은 방식이 다르다. 결과는 같다. 서해안의 불법조업은 우리 해역까지 중국 배가 들어와서, 작업하는 것이다. 동해안은 얼마간 다르다. 북한 해역에서 버젓이 조업한다. 중국어선들이 북한 해역의 입어권(入漁權)을 샀다는 흉흉한 소문만 돈다. 눈 감고 아웅 한다. 크기가 작은 치어(稚魚)도 마구잡이로 잡는다. 산란기, 금어기를 지키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자기들끼리 ‘입어권’을 사고팔았으니 확인도 불가능하다.

근래 일도 아니다. 이미 수백 년 이어졌다. 달라진 것은 없다. 조선 시대에도 이미 중국 배들과 숱한 마찰이 있었다. 불행히도, ‘마찰’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우리가 불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없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62권_서해여언(西海旅言)’의 일부다. 제목은 ‘11일, 바람이 불고 조니진에 머물다’이다. 조니진은 황해도 장연의 바닷가 포구다. 지금도 ‘중국 배의 서해 불법조업’ 지역이다.

(전략) 4월에 바람이 화창할 때면 황당선(荒唐船)이 와서 육지에서는 방풍(防風 한약재)을 캐고 바다에서는 해삼(海蔘)을 따다가 8월에 바람이 거세지면 돌아가기 시작한다. 8~9척에서 10여 척의 배들이 몰려오는데 배 1척에는 70~80명에서 큰 배는 1백여 명까지 타고 와 초도(椒島), 조니진, 오차포, 백령도(白翎島) 사이에서 출몰한다고 한다. (후략)

 

북학파 실학자인 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는 18세기 후반 사람이다. 중국은 청나라였다. 인조는,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었다(三拜九叩頭禮, 삼배구고두례). 불과 100년 남짓 전의 일이다. 만주족에 대한 두려움, 분함이 살아 있었다.

중국 배들이 우리 해안을 노략질한다.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단속할 수도 없다. 외교 분쟁(?)이 일어날 판이다. 청나라와 조선.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조공 관계다. 형식이든, 실제 내용이든 신하의 나라다. 억울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의 중국도 마찬가지다. 외국에 가서 한반도를 설명하면서 “예전 우리 조공국”이라고 말한다. 조선 시대와 지금.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 일이다.

숙종대왕 시절이다. 살림살이도 썩 좋지는 않았다. 참혹스러운 상황에서 막 벗어났을 때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년)을 막 지났다. 경신대기근은, “왜란과 호란보다 더 무서웠다”고 한다. 겨우 숨을 쉴 만한 시절이다. 중국 배들이 우리 서해안을 마구 침범한다.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노략질을 한다.

조선 초기 기록부터 황당선은 꾸준히 나타난다. 이덕무가 말하는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의 ‘황당선’ ‘중국 막가파, 어만자’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략) ‘황당선(荒唐船)’이란 무슨 말이냐 하면 의심스럽다는 뜻으로 혹 의선(疑船)이라고도 하는데, 다 등주(登州), 내주(萊州)의 섬 백성들로서 표독하고 날쌘데다 고기로 식량을 삼고 배로 집을 삼는 자들이다. 중국에서는 이른바 ‘어만자(魚蠻子)’라는 것들이고 (중략) 배들이 다 완전 치밀하여, 멎었을 때는 반드시 네 군데에 닻을 내리고 석회(石灰)로 배 틈을 발랐다. 밀랍 덩어리 같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안주에 독한 술을 마시고 머리를 흔들며 노래하면 용감하여 당하기가 어려운데, 4월에 오는 놈은 ‘망인(網人)’으로 그렇게까지 날쌔지는 않으나, 5월에 오는 놈들은 ‘수인(囚人 헤엄을 치며 해물을 채취하는 사람)’으로 뺨은 깎은 쇠붙이 같고 살결은 옻칠을 한 듯하며, 발을 위로 하고 이마를 거꾸로 한 채 발랄(潑剌)하게 파도를 가르기도 하며, 도끼를 들고 뭍에 나와서는 소나무를 진흙 쪼개듯 하고서는 어깨에다 도끼를 매고 힐끗힐끗하며 걸어가며, 남과(南瓜 호박)건 서과(西瓜, 수박)건 제멋대로 따먹고 반드시 뿌리까지 망쳐버리며, (후략)

이 글을 쓴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다. 무자년, 1768년이다. 이해 10월(음력) 이덕무는 황해도 서해안 일대를 여행한다. ‘서해여언’은 ‘서해를 보고 남긴 여행 에세이’다.

등주, 내주는 중국 산동성의 해안 도시다. 예나 지금이나 불법조업의 출발지다. ‘중국식 막가파 배’들은 청나라 강희제(재위 1661-1722년)때 심했다. 이덕무가 ‘서해여언’을 작성한 시기보다 50-100년 앞 시기다. 중국 배의 노략질은 꾸준했다.

‘어만자’는 ‘물 일하는 벌레 같은 인간’이다. 해적, 수적 중에서도 하층을 뜻한다. 인간 이하의 인간이라는 뜻이다. 우리 측 표현도 아니다. 중국인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오늘날, 단속하는 우리 측 해양경찰들에게 흉기를 들고 덤비는 중국 불법 어선의 선원이 바로 당시의 ‘어만자’다.

‘어만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망인의 ‘망(網)’은 그물이다. 추측컨대, 망인은 그물로 생선을 잡는 이다. 수인은, 맨몸으로, 바다 밑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이들이다. 수인이 망인보다 훨씬 거칠다고 했다. 오랫동안 당했으니 그들의 습성을 정확히 알고 있다. 역시 지금과 다를 것 없다. 아무리 단속해도 때가 되면 불법조업에 나선다.

이들은 내륙에 상륙하여 호박, 수박 등을 마음대로 따먹고, 뿌리까지 망친다. 나물(약초)을 캐고,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 심지어 부녀자를 희롱, 겁간했다.

황당선은 의심스러운 배, 의선(疑船)이다. 황당선은 조선 초기 기록에도 나타난다. 꼭 집어, 중국 배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중종 35년(1540년) 1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제목은 ‘황당선 한 척이 황해도 부근에 나타나 처리할 것을 예조에 이르다’이다.

“황해도 관찰사 공서린의 서장을 보니 ‘도내 풍천부(豊川府) 침방포(沈方浦)에 황당선(荒唐船) 1척이 (중략) 실로 도둑들의 선박은 아니고 필시 중국 사람들일 것이다. (중략) 만약 이 사람들이 벌목(代木)이나 물고기를 잡을 목적으로 여기에 왔다면 나머지 선박들도 꼭 찾아내야 한다. 그들을 수색할 때는 대항해서 싸울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 한학 통사(漢學通事) 2명을 속히 보내도록 하라. 첫째, 수색할 때는 대화로 설득하여 대항해 싸우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 군졸들로 하여금 가벼이 사격하지 못하도록 할 것과 둘째, 중국인을 호송해 올 때에는 잘 구호(救護)하여 올라오도록 할 것

을 예조에 이르라.”

이 글에 나오는 황당선은 불법조업 어선은 아니다. 내용으로 봐서는 단순 표류한 배다. 글 중간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이들이 벌목이나 물고기를 잡을 목적으로 여기 왔다면, 나머지 선박들도 꼭 찾아내야 한다”라고 한 부분이다. 불법적으로 나무를 베거나 불법조업하는 배들이 이미 있었다는 뜻이다. 의심스러운 황당선이라고 했다가, ‘중국인이면’이란 단서로 도적은 아닐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대처도 애매하다. 불법 선박이 있다면 찾으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통역사를 보내서 충돌하지 말고, 대화로 설득하라고 명령한다. 우리 병사들이 가벼이 사격하지 못하도록 하라, 만약 호송한다면 잘 보살펴 한양으로 보내라고 말한다.

이때 중국은 명나라다. 이미 중국 배의 노략질은 있었다.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약한 나라의 서러움이다.

중국의 약탈은 조선 시대 내내 이어졌다. 중종 때는 서해에서 우리 배의 소금을 약탈했다. 서해안 일대에서 해삼을 따고, 해안가의 약재를 채취했다. 조선 후기에는 황해도 앞바다에서 집중적으로 청어를 잡았다.

숙종 43년(1717년)의 기록에는 “황당선이 오늘날같이 많이 나타난 적이 없다. 한꺼번에 32척이 나타났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 정부는 외교문서를 보내는 등 여러 가지 조처를 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 사이, 동해의 오징어와 명태가 사라졌다. 우리 배들은 아예 출항도 하지 못한다. 출항해도 고기가 없다. 서해안 꽃게, 조기, 남해안 멸치도 마찬가지다.

‘막가파 중국어선’. 어떻게 할 것인가?

/맛칼럼니스트 황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