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모비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먼 멜빌은 미국의 소설가로 뉴욕 세관의 검사계로 일하면서 법률 소설을 활발하게 썼다.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시대에 작가는 그리 특별날 것 없는 존재로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책 표면에 새겨진 글자를 훑으며, 그것이 단지 까만 잉크로 된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생생하게 빛나는 또 다른 차원의 글자처럼 여겨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거나, 또는 글자들 낱낱을 읽어내는 파편적인 시선이 아닌 어떤 통합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바로 ‘작가’를 본다.

과거, 문학 작가의 모델은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지식이나 뛰어난 생각을 자신이 갖고 있는 문자 표기의 기술을 활용하여 글을 쓰고, 그 글을 읽는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고 나아가 동의하는 것에까지 나아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과정을 포함하는 대상이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지금보다 조금 더 특별한 것이었던 시대에 작가의 자리는 좀 더 특별한 곳에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대도시 파리의 아케이드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곳에 진열된 자본주의 상점의 상품들 속에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고대의 향기를 맡았던 작가 보들레르 이후, 작가는 거리를 산책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이 받은 감각이나 자신이 했던 정서, 생각 등을 단초로 글로 옮기는 사람이 되었다.

조금은 특별한 곳에 마련됐던 온전히 창조적인 작가의 자리는 이제는 현실 세계의 감각을 받아들이는 예민한 자의식으로 환치된다. 글쓰기가 특별한 능력이랄 것도 없게 된 지금 시대에 우리 모두는 새로운 의미의 ‘작가’가 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 작가인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이 1853년에 쓴 ‘필경사 바틀비-월가 이야기’라는 짧은 소설은 바로 새로운 시대의 작가의 모습에 대해 말해준다.

바틀비는 월가의 변호사 사무소의 세 번째 필경사로 고용됐다. 필경사란 남이 쓴 글을 그대로 옮겨 적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문서를 복사하는 기계 같은 존재이다. 바틀비는 엄청난 양의 문서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필사를 해낸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그는 자신이 쓴 글을 검토하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는 단호하게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필경사로서 글을 옮겨 적는 것은 할 수 있지만, 검토하는 것은 거부하는 태도는 일반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현대적인 작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 문제는 좀 더 복잡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글을 복제하는 기계인 복사기에게 그 글을 검토하기를 요구할 수 있을까.

바틀비는 ‘진정한 의미의 작가’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 ‘작가’가 되고자 했던 20세기의 돈키호테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필경을 멈추는 틈틈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 가끔씩 창밖을 내다보며 공상을 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그러한 지표이다. 그는 진정한 작가를 꿈꾸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은 고작해야 남의 말을 옮기는 필경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는 남의 글이 자신의 살이 되는 것을 원치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시대 작가가 처한 모순이다.

결국 모든 것을 거부한 채 죽어가는 바틀비를 기억하며, 이 소설은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바틀비는 작가가 되었지만 작가가 되지 못하는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