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한낮
봄, 한낮
  • 등록일 2019.12.08 19:59
  • 게재일 2019.12.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 규 리

치자향 흐드러진 계단 아래 반달이랑 앉아

하염없이 마을만 내려다본다

몇 달 후면 철거될 십여 호 외정 마을

오늘은 홀로 사는 누구의 칠순잔친가

이장 집 스피커로 들려오는

홍탁에 술 넘어가는 소리

소리는 계곡을 따라 산으로 오르지만

보지 않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들리는

그리운 것들은 다 산 아래 있어서

마음은 아래로만 흐른다

도대체 누구 가슴에 스며들려고

저 바람은 속절없이 산을 타고 오르느냐

마을 개 짖는 소리에

반달이는 몸을 꼬며 안달을 하는데

나는 어느 착한 사람을 떠나

흐르고 흐르다가

제비집 같은 산 중턱에 홀로 맺혀 있는가

곡진한 유행가 가락에 귀 쫑긋 세운 채

반달이 보다 내가 더 길게 목을 뽑아 늘인다



박규리 시인이 미소사라는 절집에서 공양주 보살로 있을 때 쓴 작품이다. 세속적 욕망을 털어내지 못한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 보이는 이 시는 사찰이라는 계율과 법문의 엄격한 굴레들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여전히 벗겨 내지 못한 세속의 무늬들이 스며 듦을 인식하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깨달음의 수행을 다짐하는 시인을 본다.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