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카파도키아와 최승자 시인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의 황량한 풍경. 그러나, 그 속엔 희망이 숨어 있다.

유럽과 지척인 이스탄불을 출발한 기차가 쉼 없이 20시간을 넘게 달렸을 즈음이다. 2층 침대가 마련된 특실에서 꼬박 하루를 먹고, 쉬고, 마시고, 자고를 반복하던 기자의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황량한 평원 위에 모습을 드러낸 기묘한 형상의 수많은 바위들. 지구의 풍경 같지 않았다.

가보지 못했지만 화성이나 목성의 지표면이 저러할까? 그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은 SF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하다”는 이야기. 외계인과 우주에서 온 괴물 에일리언(Alien)이 등장하는 몇몇 영화가 떠올랐다. 함께 하이데라파샤역(驛)에서 기차에 올라 꼬박 하룻밤을 함께 보낸 터키의 노부부는 놀라움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한국에서 온 사내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

“조금 더 달리면 더 기막힌 풍경이 나타날 테니 그만 놀라고 기다려봐.”

 

197×년의 우리들의 사랑 - 아무도 그 시간의 火傷(화상)을 지우지 못했다

최승자

몇 년 전, 제기동 거리엔 건조한 먼지들만 횡행했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헤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제대하여 복학한 늙은 학생들은 아무 여자하고나 장가가버리고 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약혼해 버리고 착한 아이들은 알맞은 향기를 내뿜으며 시들어 갔다.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고래 울음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 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군해 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그러나 197×년,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아무리 집중 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

어느덧 방학이 오고 잠이 오고 깊은 눈이 왔을 때 제기동 거리는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로 진흙탕을 이루었고 우리는 잠 속에서도 “사랑해, 죽여 줘”라고 잠꼬대를 했고 그때마다 마른번개 사이로 그리움의 어머니는 야윈 팔을 치켜들고 나직이 말씀하셨다. “세상의 아들아 내 손이 비었구나, 너희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개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고요히 침을 흘리며 죽어갔다.

폐허에도 꽃은 핀다. 그 꽃을 피운 힘은 인간의 의지였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이 선사한 ‘물’로 건설된 고대도시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

거기서 남동쪽으로 220km 가량을 달리면 아나톨리아 고원에 우뚝 선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엔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그곳은 ‘황무지와 폐허가 어떻게 아름다움으로 진화하는가’를 보여준다.

화산의 재가 오랜 시간 빗물에 섞여 만들어진 독특한 카파도키아의 바위는 어떤 건 버섯 모양이고, 어떤 건 우주선 모양이며, 또 다른 건 고대 유럽신화에 등장하는 용(龍)의 형상을 하고 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 식수를 구하기도 쉽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도 인간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이어갔다. 자그마치 2천 년 전부터. 그 배후엔 종교 탄압이 있었다.

그 옛날 카파도키아에 정착했던 이들은 고향에서 쫓겨난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중장비 하나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거대한 바위의 내부를 파내고 거기에 드넓은 지하도시를 만들었다. 곳곳에 암벽화를 그려 넣는 ‘예술적 행위’도 진행됐다. 인간은 인간이므로, 인간이 못할 일은 없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경이로운 시대였다.

얼핏 보기와는 달리 그 지역엔 다행히 ‘물’이 있었다. 그 물로 농사를 짓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이 준 물. 이 2가지가 폐허 위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게 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폐허’ 혹은 ‘황무지’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마음 한편이 쓸쓸하고 서늘해졌다.

사실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땅이라고 느끼는 건 고대의 터키 사람들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이 자신이 발 딛고 선 나라를 황무지나 폐허처럼 느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적 후진성과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빈곤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예술가들이 특히 그랬다.

시인 최승자(67)의 ‘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은 후진성·불평등·빈곤의 시대를 서럽고 아프게 형상화한 ‘디스토피아적 묵시록’. 이런 노래다.

 

황무지 위에 세워진 카파도키아 지역의 도시.
황무지 위에 세워진 카파도키아 지역의 도시.

▲수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힘... 희망과 생존욕구

까마득한 시절인 2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배척했다. 황제에게 머리 조아리는 걸 거부한 기독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카파도키아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마치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만들어놓은 은둔지(隱遁地)를 찾아가듯.

척박하지만 신비로운 풍경이 그들을 매료시켰다. 이런 타의에 의한 이주는 200년 넘게 계속됐다. 또 다른 수난도 있었다. 7세기 무렵 무슬림과 벌인 종교전쟁은 살벌하고 무서웠다. 창과 칼에서는 불꽃이 튀고, 피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이었다. 신들의 다툼 아래서 인간이 희생됐다.

폐허에선 꽃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카파도키아 정착민들은 희망과 꿈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바위산을 깎고 동굴을 뚫어 또 다른 지하도시를 세우고, 배수구와 식량 저장창고 등을 만들어냈다. 어떤 형태의 수난과 시련도 인간의 생존욕구를 온전히 꺾지 못했다.

최승자가 묘사하는 ‘197×년’은 실체라기보다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폐허의 시대다. 당시 한국 사회를 통치한 군사독재 정부는 젊은이들을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헤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기’를 원했다. 그들이 세상과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부도덕한 위정자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시인의 말처럼 ‘노쇠한 혈관을 타고’서도 ‘그리움의 피는’ 흐르는 법. 그 시기의 한국 사람들은 처참한 현실을 거부하며 ‘꿈속에서도 행군해 나갔다’. 구원의 메타포인 ‘그리움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

 

슬픔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카파도키아 도자기는 무척 화려하다.
슬픔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카파도키아 도자기는 무척 화려하다.

▲터키와 한국, 두 나라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카파도키아도, 우리나라도 황무지와 폐허의 시절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시대와 장소는 판이하지만 거기서 얻은 교훈은 동일하다.

“땅 위의 폐허보다 더 슬픈 건 마음속 폐허다. 그걸 이겨내는 건 인간의 의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여행한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세상에는 여전히 폐허와 황무지가 많다는 게 눈에 보인다.

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아프리카와 아랍, 인종 차별과 이민자 혐오가 지속되는 미국과 유럽, 기아와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남미와 아시아…. 더 서글픈 건 사람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열패감과 허망함이다.

그래서다. 기자는 오늘도 폐허를 아름다움으로 바꾼 희망을 되새긴다. 그것만이 황무지로 느껴지는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므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류태규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