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태정(李太丁) 역모사건

장기유배문화체험촌 한 장면. 사람냄새 가득한 유배인들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 경향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장기면장이 현감복장을 하고 멀리서 온 이들을 직접 맞이하고 있다. /서석영 장기면장 제공

1764년(영조 40) 4월 초순경이었다. ‘달문(達文)’이란 사람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의 추국(推鞠·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는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된 그 해 4월 17일, 이상묵(李尙默)이란 사람이 달문이를 사칭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이를 두고 ‘이태정(李太丁) 역모사건’이라고 한다.

달문이란 누구일까. 그는 1707년생으로 성은 이씨요. 이름이 달문이다. 이달문은 조선 팔도를 뒤흔든 최고의 스타 연예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18세기 ‘아이돌’이었던 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산대나례(山臺儺禮)였다. 산대(山臺)는 큰 길가나 빈터에 마련한 임시 무대를 말하는 것이고, 나례는 본래 귀신을 쫓는 의식인데, 광대놀음으로 더 잘 알려진 연희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중국 사신의 행차를 환영하기 위해서 광화문 앞 대로변에 임시무대를 세우고 나례를 거행하였다. 이때는 으레 탈을 쓴 광대 달문이가 주연으로 등장했다. 그가 나타나면 장안의 풍류와 무협을 숭상한 유협(遊俠·협객)의 부류들이 그를 상석(上席)에 앉히고, 마치 왕을 모시듯 떠받들었다고 한다.

달문은 단지 몸놀림으로 줄타기나 땅재주를 부리는 광대가 아니었다. 재담이나 흉내 내기와 같은 연기에도 타고 났다. 땅재주를 부리는 중간에도 눈을 흘기며 비뚤어진 입에서 지껄이는 어릿광대의 연기와 입심은 가히 따라갈 자가 없었다. 언젠가는 길을 가다가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달문이 갑자기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흉내내자 싸우던 당사자들이 웃느라 싸움을 멈췄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상에 가까운 명성에 비해 달문의 출신성분은 미미했다. 미천한 거지출신에다 얼굴마저 못생겼다고 한다. 입은 비뚤어졌는데, 그것도 너무 커서 얼굴의 반은 입인 것처럼 보였다. 몰골도 꾀죄죄해 째진 눈에 눈곱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싯적에는 청계천의 거지 패거리와 어울리면서 당시 하층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각종 연희를 골고루 배울 수 있었다.

그가 특기를 보인 연희는 만석중놀이와 철괴무, 팔풍무였다. 만석중놀이는 황진이의 미모에 빠져 파계했다는 지족(知足)선사를 조롱하는 내용의 탈춤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공연됐다. 철괴무(鐵拐舞)는 이철괴(李鐵拐)라는 기괴한 모습의 신선을 흉내내면서 동쪽으로 달리다 서쪽으로 내닫는 역동적인 춤으로, 산대놀이의 하나였다. 팔풍무(八風舞)는 남사당놀이의 땅재주넘기와 유사한 놀이였다.

영조가 이태정 사건을 직접 신문했던 사복시 청사와 홍살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가 이태정 사건을 직접 신문했던 사복시 청사와 홍살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달문이는 전국 순회공연도 다녔다. 1747년 무렵, 그는 영남을 시작으로 호남, 호서를 거쳐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스타 광문이 고을에 나타나는 날이면 천민에서부터 사대부까지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달문의 고객 중에는 어사 박문수도 있었고, 좌의정 벼슬까지 했던 풍원군 조현명도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길게 땋은 채 장가도 들지 않은 추남이었지만, 그와 공연을 함께하는 기생들은 절세미인들이었다. 광문이 때때로 재상가집 연회나 왕손들의 잔치에 초청될 때면 이름난 기생들을 이끌고 가서 한껏 풍류를 과시하기도 했다.

달문이 뭇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뛰어난 재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의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당대 및 후대 문인들의 관심을 끌었기에 여러 편의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되었다. 어려서부터 달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달문의 의로운 행실을 알리기 위해 <광문자전(廣文者傳)>이란 소설을 지었다. 실존인물 달문을 ‘광문’으로 이름을 바꾼 이 소설은 비천한 거지인 광문의 순진성과 거짓 없는 인격을 그려 양반·서민 가릴 것 없이 인간은 다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권모술수가 판을 치던 당시의 양반사회를 은근히 풍자했다.

이것뿐만 아니다. 역관이자 시인인 홍신유는 <달문가>라는 서사시를 지어 예술가로서의 달문의 삶을 조망하였다. 그 밖에도 이규상, 이옥, 조수삼 등도 달문에 관한 이야기를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이처럼 달문의 명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역모 사건에 그가 말려든 것이다.

때는 1764년(영조 40) 봄, 달문이 쉰여덟 살 되던 해였다. 경상도 영남지역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1728년에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의 잔당으로 영남지역에 숨어살던 이태정이란 사람이었다. 이태정은 나주목사로 있다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은 이하징(李夏徵)의 서자(庶子)였다. 따라서 이태정의 역모사건은 반영조의 기치를 내건 소론의 실세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이태정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방법을 강구하다가 당시 전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달문의 명성을 생각해냈다. 사회적 분위기로 봐서 달문이의 인기를 이용하면 민초들의 세력을 쉽게 규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태정은 자신을 달문의 친동생 ‘달손(達孫)’이라고 속였다. 그의 공범인 작은만(者斤萬)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이 달문의 아들이라고 사칭했다. 이들은 같은 무리인 이상묵(李尙默)과 같이 노비, 점쟁이, 승려 등의 천민세력을 규합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세력이 규합되자 이들은 나라를 원망하는 망측스러운 말을 지어내고, 또 음흉하고 참혹한 시(詩)를 지어 퍼뜨리고 다녔다.

그런데, 달문이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떠꺼머리총각이라는 사실은 온 조선 땅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에게 동생과 자식이 있다고 했으니 의심을 품은 홍유(洪洧)라는 사람이 관가에 이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일당들이 모두 붙잡히게 된다.

1764년 4월 17일, 영조가 직접 사복시(司僕寺)에 나아가 영남 죄인 작은만·홍유·이상묵·이달손(李達孫)·강취성(姜就成)과 승려 도행(道行)·문담(文淡) 및 달문 등을 친국(親鞫·중죄인을 임금이 직접 신문함)하였다. 이달손이 자신은 이태정임을 밝히고 대역부도죄를 시인하자, 영조는 숭례문에 직접 나아가서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그의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은 몰수했다. 나머지 가담자들은 모두 정상을 참작하여 멀리 귀양 보내도록 했다. 이때 가담정도가 경미한 작은만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고, 이상묵은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조사를 해보니 달문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영조는 그를 죽이려했다.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의 모습을 꾸며 인심을 현혹시키고 풍속을 괴란하였다’는 이유였다. 영조가 이런 착상을 하게 된 근거는 중국의 예에 따른 것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경공이 협곡(夾谷)에 나들이를 나갔는데, 이때 오랑캐가 풍악을 울리고 광대가 희롱을 하며 나오자 공자가 제후에게 ‘필부(匹夫)로 제후를 현혹한자는 죄가 마땅히 참수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여 처단한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

주위에서 반발이 심했다. 만약 달문을 죽일 경우 민란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영조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를 죽이지는 않고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귀양을 보냈다. ‘달문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인심을 미혹시켜 역적 이태정이 그 모습을 본뜨고 그 말투를 본뜨게 했다. 비록 본건에는 연루된 일이 없으나, 그 사람 자체가 난리의 근본이므로 변방에 유배 보낸다’는 이유를 달았다.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영조의 눈에는 달문의 행적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국을 누비며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문은 언제든지 세력을 모아 자신에게 도전해 올지도 모르는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영조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전국에 공포할 정도로 민감하게 대처했다. 이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조선 최초의 장발단속 규정이다.

만석중놀이 공연. 이 놀이가 달문을 일약 18세기 스타 연예인으로 만들었다.
만석중놀이 공연. 이 놀이가 달문을 일약 18세기 스타 연예인으로 만들었다.

원래 작은만이란 사람은 경상도 개령(김천시 개령면)에 있는 수다사에서 밥을 빌어먹던 사람이었다. 그는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절에 사는 스님들이 달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스님들은 모두가 달문이를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작은만은 달문이의 이름을 팔면 구박받지 않고 절밥을 더 잘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바로 그 달문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다. 스님들이 깜짝 놀라 그때부터 작은만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역모를 꾀하던 이태정이었다. 그는 작은만이 스님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달문이를 이용하면 쉽게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만에게 자기를 작은아버지라고 불러주면 앞으로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꾀었다. 그때부터 작은만은 이태정을 삼촌이라 불렀고, 이태정은 자신이 달문의 친동생처럼 행동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로 달문은 경성에 유배 갔다가 다음해 9월 5일에 방면됐다. 달문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자 남녀노소가 떼거리로 몰려나왔다. 구경꾼들로 인해 한양의 저잣거리가 한동안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는 그 사이에도 식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달문은 옛날의 그 달문이 아니었다. 열혈 팬들의 환대를 마다하고 어디론가 훌쩍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명성을 뒤로한 채 홀연히 사라진 그를 사람들은 추억하며 그리워했다.

달문은 왜 이렇게 유명세를 탔을까. 비록 가문이 몰락하여 걸인의 생활을 하였지만, 신의와 의협심이 남달랐다. 남들이 업신여기는 기생과도 인간적인 교유를 맺었다. 외모가 못 생기고 어리석게 보였으나 생각이 깊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다. 심지어 자신의 인기와 명성을 이용하는 자들로 인해 억울한 유배생활을 하고 돌아왔지만 원망하지도 않았다.

복잡다단한 인생 역정을 지닌 광대 달문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절정에 닿은 인기를 마다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오히려 더 유명해졌던 이달문. 그의 파란만장한 행적들이 가을걷이 끝난 빈 들판처럼 허허롭게 다가온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