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암과 관음도, 죽도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삼선암과 관음도, 죽도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짙푸른 바다가 주는 낭만을 사랑하는 관광객, 복잡한 도시에서의 일상을 벗어나고픈 여행자에게 울릉도는 지상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유토피아’에 가깝다. 어떤 필설로 도동항 파란 물빛과 나리분지의 적요한 평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울릉도에선 ‘아름다운 자연’이란 문장이 은유나 상징이 아닌 직설이 된다. 바로 이 울릉도를 최근 버스를 타고 일주했다. 그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포항을 출발한 배가 3시간째 항해를 계속했다. 파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울릉도를 향하는 썬플라워호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멀미약을 잔뜩 챙겨 온 게 후회될 정도였다. 19세기 유럽 표상주의의 거장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1854~1891)의 시(詩) ‘취한 배’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선내 방송이 울릉 도착을 알렸다. 섬의 관문인 도동항이다.

“이곳이 울릉도입니다”라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선착장 곳곳에서 해풍과 햇빛에 맛있게 말라가는 오징어가 울릉 특유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다. 울릉도에 무사히 온 것이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기에 도동항에서 오징어회로 허기를 달랬다. 먹물을 뿜으며 펄펄 살아 뛰는 오징어 3마리를 회치고, 각종 양념과 쌈채소, 거기에 소주 1병까지를 더해 단돈 2만원. 육지라면 상상하기 힘든 저렴한 가격이다. 사파이어빛 바다를 마주하고 마시는 술이 달콤했다. 일상 탈출이 주는 ‘행복 에너지’ 때문이었을 터.

21세기. 여행의 방식과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세대간 차이일 수도 있고, 남녀의 차이일 수도 있으며, 관광객의 취향 차이일 수도 있다. 모두는 각기 다른 형태로 각자의 패턴에 따라 여행지를 둘러본다.

어떤 사람은 ‘가능하면 많은 곳’을 돌아보길 원하고, 혹자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여행’을 지향한다. 스스로 차를 운전해 관광지를 향하는 이가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기자가 울릉도 여행의 방식으로 선택한 건 ‘버스 타고 섬 일주’.

 

울릉도 남양리 해변.
울릉도 남양리 해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울릉도의 기막힌 풍광

도동항을 출발한 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를 빠져나왔다. 마침내 펼쳐지는 원시의 바다 풍경. 눈이 시릴 정도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

내수전 몽돌해변을 지나 얼마 달리지 않자 울릉도를 여행한 이들이 “최고의 비경”이라 입을 모으는 삼선암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3명의 선녀가 바위가 됐다는 전설. 게으름뱅이 막내 선녀가 변해 만들어졌다는 바위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재밌는 설화다.

몇 년 전. 몬테네그로에서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적이 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아드리아의 바다 빛깔이 너무 고와서 3시간 넘는 이동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울릉도 버스 여행의 시작도 그와 같았다.

삼선암 뒤로 밀려가는 물결에 관음도와 죽도가 미려한 자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 본 단아한 매력의 승무(僧舞) 같았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관음도엔 2012년 보행연도교가 생겼다. 이젠 탄성 부르는 그 섬의 숲을 관광객 모두가 볼 수 있다.

울릉도를 사랑한 시인 김선우(49)는 “섬에 핀 작은 꽃 한 송이, 조그만 풀잎 하나까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 2박3일을 예정하고 떠났던 울릉 여행이 1개월이 돼버렸다던가? 울릉도의 풍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김 시인의 심정이 이해되고도 남았다.

100만 달러짜리 풍경을 시시각각 보여주던 버스는 두루봉과 석포 일출전망대를 스치듯 지나 천부항에 닿았다. 40분 남짓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느낌이었다. 그 감흥을 안고 일단 차에서 내렸다.

 

기묘한 형상의 삼선암.
기묘한 형상의 삼선암.

안개 낀 나리분지가 선물한 평화로운 고요

해발 500m쯤에 자리한 나리분지는 겨울철 ‘무섭게 쏟아붓는 눈’으로 유명하다. “그 배경이라면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보다 더 근사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진담 같은 농담 혹은, 농담 같은 진담이 떠도는 곳.

나리분지로 가기 위해선 천부항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출발까지는 시간이 30여 분 남았다. 6m 깊이의 바다를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해중전망대는 돌아 나올 때 가기로 했다. 대신 천부항 방파제 부근을 짧게 산책했다.

인적이 드문 섬의 해변. 여행자를 반기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소금기 묻은 바람이 애인의 손길처럼 머리칼을 매만져주는 나른한 오후.

그 분위기에선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 한 자락이 참으로 잘 어울릴 듯해 스마트폰으로 ‘하늘 가는 길’을 플레이시켰다. 때론 혼자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삶의 깊은 상처를 치료해주기도 한다. 그건 여행의 힘이기도 하다.

나리분지행 버스에 오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차창 밖 배경이 푸른색에서 향기로운 초록색으로 변했다. 울울창창 울릉도의 나무들 속엔 신령함이 깃들어 신선들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도동항-천부항 구간과 마찬가지로 천부항-나리분지 구간도 최고의 버스 여행 코스였다. 오르막길을 달려온 버스가 내리막으로 접어들자 나리분지가 나타났다.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로 불리는 나리분지는 동서와 남북이 약 2km 남짓. 작은 땅이다. 그러나 그 곳의 사람살이까지 작을 수는 없다.

혹독한 자연조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지혜롭게 극복한 울릉도 사람들의 ‘건축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너와집과 투막집을 둘러봤다. 말 그대로 ‘투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가옥들.

기자가 도착한 날은 옅은 안개가 나리분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어디선가 밀려온 꽃향기가 몸 안으로 번져들었다. 주홍빛 열매를 매단 나무들이 예뻤다. 가끔씩 새가 울었고, 더 가끔 동네 사람들이 키우는 개가 울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웠고, 평화롭고 고요했다. 아스팔트와 네온사인이 점령군으로 행세하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살아온 기자는 나리분지의 고요와 평화가 진심이 담긴 울릉도의 선물로 느껴졌다.

 

나리분지.
나리분지.

울릉도 서쪽을 굽이굽이 돌아 다시 도동항으로

울릉도 버스 일주가 서장과 중장을 지나 종장으로 접어들었다.

나리분지에서 천부항으로 돌아와 섬의 북쪽과 서쪽을 시원스레 내달리는 버스에 올랐다. 멀리 보이는 코끼리바위와 현포항을 지나 남서 일몰전망대까지의 풍경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입 아프다. 당연지사 짐작했겠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

통구미 몽돌해변에 잠시 내려 느린 걸음으로 주위를 배회했다. 목적이나 이유를 잠시 내려두고 근사한 자연을 벗 삼아 ‘어슬렁거린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우리는 너나없이 너무나 ‘목표 지향적’으로만 살아오지 않았던가. 답답하고 갑갑하게도. 통구미 마을엔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9마리의 거북이가 있다. 아니, 거북이 형상의 바위가 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 거북의 마리 수가 달라진다는 게 흥미롭다. 마을 절벽엔 향나무 수백 수천 그루가 좋은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천연 향수였다.

통구미 해변에서 도동항까지는 금방이다. 차로 10~20분. 울릉신항과 울릉예술·문화체험장을 뒤로 하고 사동항을 지난 버스가 여행의 출발지였던 도동항에 기자를 내려놓았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를 방불했던 ‘버스 타고 울릉도 일주’가 끝났다.

 

나리분지의 투막집.
나리분지의 투막집.

천부항에서 점심으로 먹은 국수 값까지를 포함해 1만 원 가량의 작은 돈으로 ‘해보기 힘든 방식의 여행’을 마무리한 것이다. 기분이 어땠냐고? 부연할 것 없이 “좋았다”.

울릉도 곳곳엔 숨겨진 매혹의 장소가 적지 않다. 행남 해안산책로, 독도박물관, 울릉자생식물원, 대풍감 해안절벽,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엔 ‘우리 섬’ 독도까지 있다. 1박2일의 짤막한 울릉 여행은 아쉽고 싱겁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일주일쯤 그 섬에 머물러보길 진심으로 권한다.

랭보는 삶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고 규정했다. 시인의 세계 인식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어둡고 비극적이다. 설마 인간의 생이 ‘지옥에서의 시간’만으로 구성됐겠는가. 폐일언. 울릉도 여행은 기자에게 ‘천국에서 보낸 3일’이었다. /홍성식·김두한기자

    홍성식·김두한기자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