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임오화변(壬午禍變)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 (영조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백성들은 감히 접근조차 어려운 구중궁궐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지만, 엽기적이고도 비극적인 이 사건은 한양에서 864리 떨어진 경상도 장기현 사람들에게도 마치 곁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해 윤5월 15일 장기로 온 홍지해(洪趾海)와 뒤이어 7월 11일에 온 목애(睦愛)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부른 이 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얽혀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이유 하나를 꼽으라면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들 수 있다. 신임의리는 1721년(신축년)∼1722년(임인년)에 경종 대신 연잉군을 지지하다가 곤란을 겪었던 노론 측의 의리를 부르는 말이다.

역사를 돌이키자면, 숙종이 사망할 무렵인 1700년대의 조선 조정은 세자(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으로 나뉘었다. 그때는 소론이 지지하던 세자가 경종 임금에 올랐으나, 경종은 병으로 몸이 약했다. 노론은 그런 경종에게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까지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이 일로 노론의 대표주자인 영의정 김창집 등 수백여 명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이른바 ‘신임옥사’란 것이다.

경종이 일찍 죽고 이제 연잉군이 영조임금으로 즉위했다. 영조는 즉위하자말자 그때 자신에게 기울였던 노론들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른바 ‘신임의리’를 지킨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 노론의 세상이 됐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혈기왕성한 세자는 노론의 특수한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사도세자는 노론들이 내세우는 신임의리를 나 몰라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노론과 사도세자 간에는 첨예한 갈등이 생겼다. 이는 아버지 영조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까지 왜곡되게 받아들여지면서 그 결말은 비참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

영조에게는 모두 여섯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아들 복이 없었다. 첫째 아들 효장세자는 일찍 병으로 죽었다. 그로부터 7년 뒤, 나이 마흔 둘에야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얼마나 애지중지했든지 영조는 이듬해 그 아이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자는 1744년에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와 혼례를 올리고, 열다섯 살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며 정계에 관여했다.

 

창경궁 휘령전. 창경궁 문정전은 휘령전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영조의 첫째 왕비 정성 왕후의 신위를 모신 전각으로, 사도 세자는 이곳에서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창경궁 휘령전. 창경궁 문정전은 휘령전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영조의 첫째 왕비 정성 왕후의 신위를 모신 전각으로, 사도 세자는 이곳에서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사도세자의 악행에 대해 구구절절 기록하고 있다.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도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손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환관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자신의 부인에게 가져다준 일, 영조의 침방나인이었던 박씨를 건드려 임신시킨 일, 후궁을 살해한 일, 가선이라는 여자를 겁탈하고 궁중에 몰래 들인 일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둘 때 반포한 <폐세자반교문>에 따르면, 세자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백여 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데, 정작 영조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이 있기 전까지는 세자가 이렇게까지 패륜아인지 몰랐던 모양이다.

잠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조정에는 영의정 홍봉한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로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다. 이 무렵, 조정에는 사도세자를 시기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김한구(金漢耉)였다. 김한구는 이제 겨우 열다섯 된 딸을 영조의 계비(정순왕후)로 들여보내면서 실권을 잡으려 했다. 그때 영조의 나이는 예순 다섯이었고, 이미 궁중에는 정순왕후보다 열 살이나 많은 아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김한구는 사도세자 측과는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아들 김귀주(金龜柱)와 함께 외척당인 남당을 만들어서 당시 실세인 북당의 홍봉한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홍봉한을 탄핵하는데 주력해 공홍파(攻洪派)라고 불렸다. 하지만 영조가 오히려 홍봉한 등 척신들을 끼고돌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김한구는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윤급(尹汲) 등과 힘을 합쳐 홍봉한 세력을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그때 끌어들인 사람이 나경언이다.

나경언은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다고 한다. 김한구 등은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을 시켜 형조를 찾아가 ‘환시(宦侍)들이 반란을 모의한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반란사건은 사안이 엄중하므로 임금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영조가 친국을 하자 나경언은 갑자기 옷소매에서 미리 준비해둔 고변서 한 장을 꺼내 바쳤다. 그 고변서에는 “세자가 일찍이 궁녀를 살해하고, 여승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시키고,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안도에 몰래 나갔으며, 북성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라는 등 세자의 비행 10여 조가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나경언은 ‘동궁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고 자백을 하였다.

충격을 받은 영조는 탕제(湯劑)와 정무(政務)를 거부하며, 세자에 대한 실망과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엉겁결에 영조 앞에 불려나온 세자는 창경궁 시민당(時敏堂)에서 20일 넘도록 대명(待命)하며 석고대죄해야 했다.

억울함을 느낀 사도세자는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하였으나, 영조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이후 세자의 비행 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을 내렸다. 세자가 자결하지 않고 버티자 결국 영조는 1762년 윤5월 13일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뒤주 속에 가뒀다. 속에 갇혔던 세자는 8일 만에 굶어죽었다. 이때 사도세자의 비행과 임오화변이 있었던 그날의 상황 등은 훗날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세밀히 따져보면 의심이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나경언의 신분부터 보자. 남의 집 하인에 불과했는데, 일개 하인이 목숨을 걸고 일국의 세자를 고발해야할만한 동기가 있었을까? 심지어 나경언은 자신이 갖다 바친 고변서의 내용도 숙지하지 못했다. 그 배후가 의심되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 당일 판의금부사 한익모(韓翼謩)는 나경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이를 사주한 배후를 철저히 가려야한다고 주청했으나, 영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파직시켰다. 홍문관 관리들도 들고 나섰다. 바로 김종정(金鍾正)·박사해(朴師海)·남현로(南玄老)·홍지해(洪趾海)·이득배(李得培)가 그들이다. 이들은 윤5월 6일, 나경언을 빨리 역모죄로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크게 노하였다. 이 상소를 받아 준 승지 및 관리들의 파직을 명하고, 접수한 상소들을 모두 되돌려주게 하였다. 이튿날까지 영조는 분이 안 풀렸던지 상소를 올린 자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영남 바닷가(沿海)로 정배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응교(應敎) 김종정은 청하현, 교리(校理) 박사해는 장기현, 교리(校理) 홍지해는 동래부로 귀양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날 다시 남현노(南玄老)와 김종정, 홍지해와 박사해의 배소를 서로 바꾸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홍지해가 윤5월 14일 경상도 장기로 오고, 박사해는 동래부로 귀양을 가게 된다. 영조는 이어서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문책하였다.

영조의 이런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상소는 이어졌다. 홍낙순(洪樂純)과 남태제(南泰齊) 등이 나서서 ‘나경언은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 이라는 주장을 계속해서 올리자 영조의 마음도 이제는 돌아섰다. 그해 윤5월 22일, 영조는 ‘나경언의 행동이 가상하지만, 형조에 거짓으로 반란이 있다고 신고하여 임금을 놀라게 한 죄가 있다’는 이유로 결국 그를 참수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또 한사람이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는데, 여자였다. 바로 1762년 (영조38) 7월 11일 목중도(睦重道)의 나이어린 손녀 목애가 연좌되어 장기로 온 것이다.

춘천에 살고 있던 조재호(趙載浩)는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조재호는 효순왕후(영조의 장남으로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비) 조씨의 오빠였다. 조재호는 과거에 급제한지 불과 10년 만에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 뜻을 같이한 목중도 등과 함께 한양으로 왔지만, 모두 역모죄로 몰렸다. 이들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졸지에 할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장기로 온 목애는 34년간 이곳에서 관노(官奴)로 있다가 1796년(정조 20) 1월 11일에야 유배가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장기현 관아에서 썩힌 후였다.

 

한중록(恨中錄).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이자 사도세자의 그날을 기록한 일기이다.
한중록(恨中錄).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이자 사도세자의 그날을 기록한 일기이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곧바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줬다. 그리고 아버지의 불명예스런 죽음으로 세손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조치도 강구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을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영조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天倫)보다도 세손이 왕(정조)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할 다음의 정치적 상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1777년 재위한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후에도 사도세자를 추존해달라는 상소가 계속되었다. 이때 조선 최초로 ‘만인소’란 게 나왔다. 영남 유생 1만 57인이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해 연명 상소를 한 것이다.

노론은 둘로 갈라져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파와 그렇지 않은 벽파로 나뉘었다. 두 당파는 정조의 탕평책으로 붕당 간의 싸움이 약간은 완화되었지만,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1801)하자, 권력은 다시 노론 벽파에게 넘어갔다. 특히 노론 중에서도 왕실의 외척들 손에 조정이 좌지우지되면서 조선사회는 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